산행기 및 여행기

신선이 머무는 곳[영산대-주남고개-밀반늪-미타암-법수원 산행기]

월지 2006. 6. 19. 22:18
 

늦은 잠에서 깨어 씻고 밥 먹고

배낭 챙겨 나오니 벌써 12시 30분이 넘었다.


요즘은 산행일정과 코스가 잘 맞지 않아

벌써 한 달 이상 세월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토요일은 나 홀로 산행에 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원점으로 회귀해야 하는

한계 때문에 산행코스를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래저래 잘 안돌아가는 머리를 짜내

생각해 낸 곳이 천성산(千聖山)이었다.


능선이 길고 완만하게 이어진데다,

산 아래로 7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어

왔던 길을 되밟아 가지 않고도 대중교통을 이용해

쉽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벌써 몇 주째 덕계 무지개 폭포 쪽이나

새진흥 아파트(6차) 쪽에서 시작해서 임도를 타고 진행하다가

주남고개를 거쳐 영산대학교로 하산하거나 그 반대의 코스를 탔다.


- 이 완만한 서너 시간 짜리 임도 코스는

여름날 밤의 야행코스로는 안성맞춤이 아닐까 싶다. -


이렇게 몇 번을 같은 코스를

반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길이 가는 풍광이 있었다.


바로 천성 2봉 동쪽 사면(斜面)이었다.

산 정상 근처에 펑퍼짐한 분지가 형성되어 있는 것도 기괴하거니와

그것이 남쪽과 북쪽에서 완만한 계곡을 형성하여 중간에서 합류한 다음

동쪽으로 급경사를 이루며 떨어지는 형상이 여간 범상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반드시

그 비경(秘境)을 탐사해보리라 마음먹었다.


롯데마트 웅상점에서

생수와 김밥, 라면과 소주를 사고

지리정보를 얻기 위해 지도를 뒤적이다 보니,

영산대학교에서 산행을 시작할 때는 이미 오후 2시가 넘어 있었다.

 

 

영산대학교에서 주남고개로 이어지는 임도에는

노랗게 물든 밤꽃이 지천으로 피었고, 그 이상야릇한

밤꽃의 향기는 묘한 기대감으로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한낮의 태양에 후끈 달아오른 풀냄새와

거기에 섞인 하얀 찔레꽃의 상큼한 향기와 노란 인동 꽃의

달착지근한 향기는 낮술을 마신 것처럼 불콰한 취기(醉氣)를 몰아왔다.


군데군데 탐스럽게 매달린 산딸기를 따먹으며

쉬엄쉬엄 가파른 길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주남고개였다.

 

 

 

여기서 왼쪽으로 방향을 꺽어

길고 완만한 임도를 타고 가니

산 아래로 소주공단과 웅상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은근한 오르막이 끝나고,

임도길이 평탄해 질 무렵

비범하게 보이는 그 분지가 나타났다.  

 

 

미련 없이 임도를 버리고 왼쪽 분지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간 숲길을 헤치고 들어가자, 키 작은 풀밭이 나오고

신발 아래가 물컹거리며 넓은 늪지대가 나타났다.

 

 

갑자기 까르르하는 개구리 소리와

쟁반위로 구슬이 떨어지는 듯한 새 소리가 들리고

싱싱한 찔레꽃 사이로 화사한 빛깔의 호랑나비와

소박한 빛깔의 노랑나비가 어지러이 날고 있었다.

 

 

지금껏 걸으면서 보아온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선 듯한 착각에 빠져

갑자기 머리털이 쭈뼛 일어서기도 하였다.

 

 

 


그렇게 얼마간 늪지대를 통과하자

물이 한군데로 모이며 작고 완만한 개울을 이루고

저 앞 남동쪽 계곡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멀리 남쪽을 보니

그 쪽도 이쪽과 마찬가지로 완만하게 개울과 계곡을

이루더니 중간지점에서 이쪽 계곡과 합쳐져

급하게 동쪽으로 내려 꺾이고 있었다. 


한동안 계곡을 따라 이어진 숲길을 헤쳐 나오다

어느 한곳 전망 좋은 바위위에 앉아 사방을 조망하였다.

 

 

산정(山頂)에 이런 깊고 유장한 계곡이 숨어 있다니...,

신선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에 머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이쪽 계곡과 저쪽 계곡이 만나는

합수부(合水部)에 이르니 높은 바위벼랑이

우뚝하게 버티고 서있다.


합수부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남쪽에서 발원한 계곡을 향해 거슬러 올라갔다.


완만한 계곡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이어진 길을 따라가니 곳곳에 적당한 크기의

소(沼)와 담(潭)이 숨어 있고, 군데군데 쉬어가라는 듯

평평한 바윗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에 한 바윗돌에 자리를 잡았다.

버너를 꺼내 라면을 끓이고

준비해간 소주병을 비우기 시작했다.


많은 땀을 흘린 뒤끝이라

그런지 금세 취기가 올랐다.


취기가 오르니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우선, 그 자리부터 이름을 지어주기로 하고

골똘히 생각하다 “이속대(離俗臺)”라는 멋진 이름을 떠올렸다.


이속대(離俗臺)..., 

세상을 떠난 자리...,


그렇다.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일랑 잊어버리자.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난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그 누구의 아빠도, 그 누구의 남편도

아무개 법률사무소의 박사무장도 아니다.


나는 그저 나였다.

나는 묵직한 바윗돌이고

시원한 물소리이고 청량한 바람소리였다.


그렇게 나는 계곡의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끝없는 희열이 몰려 왔다. 존재한다는 것의 즐거움...,

실존(實存) 그 자체로서의 무한한 기쁨...,


그런데, 나는 무엇을 움켜쥐려고

세상의 명리(名利)를 따라 아등바등 나부댔던가...,


얼마를 그렇게 있었는지 모르겠다.

약간의 한기(寒氣)를 느낄 즈음 다시 배낭을 챙기고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얼마 후 계곡을 빠져나와 산록(山麓)에 이르러

돌아본 계곡은 마치 꿈속에서 거닌 듯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이참에 아예 이 계곡을

내 숨겨진 비원(秘苑)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일었다.


그러자면, 이 계곡을 좀 더 알아야 했다.

그리하여 당초 임도를 따라 덕계 새진흥 아파트 쪽으로

하산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산록에서 방향을 왼쪽으로 잡아

산 능선을 따라 하산하기로 하였다.


그쪽을 따라가면,

합수부에서 만난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을 만날 수 있을 터였다.

 

 

 

 

 

 

 

얼마를 걸어 산등성이를 넘어서자

덕계 쪽 들판이 훤하게 내려다보이고,

새끼줄 같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산 모롱길을

따라 내려오자, 갑자기 구수한 연기냄새와 함께

산비탈에 위태롭게 매달린 작은 암자가 나왔다.

 


말로만 듣던 “미타암(彌陀庵)”이었다.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주위를 찬찬히 조망할 틈도 없이

가파른 계단길을 미끄러지듯 걸어 내려왔다.

 

 

한참을 내려오니 갈림길이 나오고,

왼쪽으로 “법수원 600m”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직감적으로 그 길이 합수부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임을 알았다.


뛰듯이 그 길을 쫓아가니

역시 가파른 계곡을 좌우로 거느린 채

담담하게 동쪽을 주시하고 있는 허름한 암자가 나왔다.

법의 물이 발원하는 곳, 법수원(法水源)이었다.

 

 

법수원(法水源) 왼편 계곡은

역시 나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까마득한 바위절벽 아래

작고 귀여운 다리 밑으로

법(法)의 물이 세월을 잊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여기까지였다.

산 아래로부터 밀려올라 오는

어둠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다음을 기약하며 다시 뛰듯이 본래의 하산 길로 되돌아와

얼마쯤 내려오니 맙소사! 여기까지 차가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용케 하산하는 차를 얻어 탔다.

걸어 내려왔으면 족히 30분은 넘게 걸렸을 길을

단숨에 달려 내려왔다.

 

 

계곡 끝자락을 모듬어 안고 있는 이름 모를 연못의 

못둑에 서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제는 언제라도 달려와 안길 수 있는

내 비원(秘苑)이 되어버린 그 산이 서서히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2006.   6.   17.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  月池

 

 

*산행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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