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추억

못[망향부(望鄕賦)]

월지 2005. 10. 25. 15:46

어머니의 호출이다. 어머니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쌀 가져가라”, “고추장 가져가라”는 등 주로 무엇을 가져가라는 명목으로 부른다. 물론 그 부름 속에는 아들이 보고 싶은 속내가 들어있을 터이다. 이번에는 미꾸라지를 잡아 솟궈 놓았으니 가져가란다. 


이번에는 딸아이와 동행을 했다. 울산에서 언양으로 가는 24번 국도를 타고가다 갈림길에서 선바위 쪽으로 우회전을 한다. 망성(望星), 중리(中里), 지지(知止)를 지나고 허고개를 넘으면 바로 두동(斗東)이다. 그리고 허고개를 넘어 300m정도를 내려가면 갈림길이 나오고 여기서 우회전을 하면 만화리(萬和里)다. 여기서부터는 차의 속도를 낮춘다.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한적한 시골길. 고개를 들면 손에 잡힐 듯 치술령(雉述嶺)이 가까이 보이고 들판에는 누렇게 익은 벼들이 물결을 이루며 출렁인다. 길가에는 구절초, 쑥부쟁이가 청초하고 억새가 바람에 낭창낭창 흔들리며 얇은 웃음을 뿌린다. 그 위로 살찐 메뚜기 떼들이 차 소리에 놀라 어지럽게 난다. 갑자기 뻣뻣했던 어깨가 스르르 풀리면서 몽롱하면서도 달콤한 편안함이 온몸을 감싼다. 


고향집에 도착하자마자 딸아이는 포충망(捕蟲網)을 들고 잠자리를 잡으러 가자고 조른다. 지난여름 잠자리 잡는 법을 가르쳐 주었더니 재미를 붙여 야외로 나오기만 하면 포충망을 들고 설친다. 길가나 논두렁 밭두렁의 풀밭을 헤집으며 아이는 잠자리를 잡고 나는 메뚜기며 여치, 방아깨비를 잡았다. 어쩌다 어설픈 잠자리가 포충망에 걸려들면 아이는 그걸 제 손으로 집어내지 못하고 연방 소리만 지른다. 감나무 아래에 떨어진 홍시도 줍고 밤나무 아래 풀 섶을 헤치며 알밤도 주웠다.


그런데 아까부터 어디선가 쿵! 쿵! 육중한 기계음이 들린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을 앞 못 둑에서 중장비 한대가 못 둑에 쇠말뚝을 박고 있다. 지금까지 잡아 놓은 곤충들은 모두 풀어주고 딸아이의 손을 잡고 못 둑으로 향했다. 못 둑을 가득 덮고 있던 억새들은 막 벌초를 끝낸 듯 깨끗하게 베어져 있고 못 둑길을 따라 가지런히 쇠 파이프가 박혀 있다.


일하고 있는 아저씨에게 “왜 이렇게 쇠 파이프를 박고 있느냐?”고 물으니 못 둑에 물이 새서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공사현장을 지나 딸아이를 풀어놓고 야트막한 둔덕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푸른 하늘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는 못물을 내려다보며 아스라한 추억(追憶)에 잠겼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은 울주군 두동면 월평이다. 치술령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 중에서는 가장 큰 골짜기와 물줄기를 끼고 있고 두동면에서는 가장 큰 들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이 골짜기의 물은 울산 태화강(太和江)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곳의 물은 서북쪽으로 흐른다. 그리고 경주를 거쳐 포항의 형산강(兄山江)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의 말투나 음식, 풍습 따위는 울산보다는 경주에 더 가깝다. 거리(距離)로나 교통(交通)으로 따져 보아도 그렇다. 치술령 정상에서 서북쪽을 내려다보면 월평(月坪)에서 봉계(鳳溪)까지 십리(十里)에 걸쳐 넓은 들이 길쭉하게 펼쳐져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달 월(月)자를 닮아 동네 이름을 월평(月坪)이라고 부른다.


내 고향은 월평 안에서도 못안[池內]이라는 곳이다. 마을 앞에 못이 있고 그 못 안쪽에 마을이 있기 때문에 동네이름이 그렇게 지어졌단다. 이 못은 원래 천연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신라시대 때 이미 못 안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던 모양이다. 이 못안 마을은 신라 충신 박제상의 처가 곳이라고 한다.


고향에는 다른 동네에 비해 못이 유난히 많다. 이 못안못 말고도 규모가 더 큰 백양골못, 뒷골못, 삽다리못, 새못 등이 주위에 널려 있다. 이렇게 많은 못 중에서도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이 가장 많이 깃든 못은 역시 못안못이다.


고향집에서 못안못과 앞산을 바라보면 마치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못에 고개를 쳐 박고 고기를 잡아먹는 형국으로 생겼다. 그런데 옛날에 못을 수리하면서 맬개[여수로(濾水路): 못에 물이 가득차면 흘러 넘쳐나가는 수로]를 내기 위해 새의 목 부분에 해당하는 곳을 파게 되었는데 갑자기 그곳에서 선혈(鮮血)이 분출하며 용마(龍馬)가 튀어나와서는 한차례 길게 울음을 내뱉으며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고 한다. 그 이후 마을에 궂은 일이 잦았다고 한다.


옛 어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못 둑 전체가 아름드리 나무들로 빽빽하게 덮여있어 두들 들판에서 보면 마을이 숲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에는 그 좋던 나무들은 거의 다 베어져 윗동이 잘린 그루터기들만 못 안에서 뒹굴었다. 그래도 서나무 몇 그루는 마을의 수호신처럼 못 둑에 서있었고 못 안쪽으로는 드문드문 무성한 버드나무가 낚시꾼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었다.


고향은 어느 한 도시(都市)에 붙어있지 못했다. 대처(大處)라고 할 수 있는 울산, 경주, 언양이 모두 비슷한 거리로 멀었다. 그리하여 고향은 상당히 깡촌이었다. 마을에 전기(電氣)가 들어온 것은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인 1974년 무렵이었고 그로부터 1~2년 사이에 마을의 초가지붕들이 시멘트 기와집으로 개량이 되었다. 호롱불 밑에서 책을 보다가 머리를 그을리고 처마에서 노린재와 굼벵이가 툭툭 떨어지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연히 남아 있다.


마을에 신작로(新作路)가 생기고 울산으로 통하는 시외버스가 다니기 시작한 것은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인 1980년 무렵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20리 남짓 떨어진 중학교를 자전거를 타고 통학해야 했다. 산길과 논길을 따라 이어진 그 자전거 통학 길에서 우리는 이웃마을 중학교 선배들에게 숱하게 얻어터지기도 하고 숙제가 많은 날에는 중간에 땡땡이를 치며 과일서리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그래도 문명의 이기가 본격적으로 보급(普及)되기 전인 1970년대 중후반의 저 못안못을 배경으로 한 내 유년(幼年)의 추억(追憶)은 몽롱하지만 찬란한 금빛으로 채색(彩色)되어 있다.


아직 얼음이 채 녹지 않은 시냇가에서 보송보송한 버들개지가 그 꽃망울을 틔울 때쯤이면 서북쪽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차고 매서웠지만 양지바른 논둑과 밭둑에는 어김없이 파릇파릇한 풀들이 돋아났고 올망졸망한 계집아이들은 작은 바구니를 끼고 쑥과 냉이 따위 봄 푸성귀를 캤다. 


봄이 좀 더 무르익어 울긋불긋한 벚꽃, 복사꽃, 진달래꽃이 일제히 피어나고 산이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할 때쯤이면 사내아이들은 바지를 걷어 올리고 겨우내 소똥을 치우던 싸리나무로 엮은 소쿠리를 들고 못 가의 누렇게 시든 수초(水草)사이를 누비며 고기를 떴다.


끌어올려진 소쿠리에는 붕어, 미꾸라지, 민물새우, 피라미, 버들치, 물방개, 소금쟁이 따위가 퍼덕거렸다. 그중에서도 물방개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단연 인기가 있었다. 까맣게 윤이 나는 딱딱한 껍질을 가진 그 놈들은 오백 원짜리 동전 보다 조금 큰 긴 타원형으로 생겼는데 햇볕에 몸이 마르면 파르르 날아오르기도 했다. 아이들은 그놈들의 꽁무니를 살살 간질여 자기들끼리 싸움을 붙이기도 하고 다리에 실을 묶고 어떤 놈이 더 멀리 날아가는지 내기를 하기도 했다.


여름이 되면 아이들은 통발로 고기를 잡았다. 그때만 해도 아이들이 돈을 주고 통발을 산다는 것은 엄두도 못 냈다. 아이들은 소주병으로 유리 통발을 직접 만들어 섰다. 등유에 적신 명주실을 소주병의 목과 몸통 중간지점에 칭칭 감아 불을 붙인 후 다 타고 나면 소주병을 물에 집어넣는다. 그러면 온도 차이에 의해서 실을 감은 부위가 쩍 갈라지면서 소주병이 두 동강이 난다. 아가리가 있는 쪽을 뒤집어서 몸통이 있는 쪽에 끼우고 고무줄 따위로 고정을 시키면 훌륭한 유리통발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유리 통발에 된장을 조금 넣고 1시간 정도만 못에 담가두면 신기하게도 피라미가 통발에 와글와글 들어 있었다. 피라미를 냄비에 통째로 넣고 매운탕을 끓여내면 약간 쌉싸래한 맛이 돌면서도 감칠맛이 나는 것이 일품이었다.


또 여름이 되면 못 가의 얕은 부분에는 창포가 지천으로 자라났다. 사람들은 이것을 베어다가 여름밤 모깃불을 피웠다. 그러면 싱싱한 풀냄새가 섞인 매캐한 연기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했고 아이들은 갓 캐낸 감자나 밭에서 꺾어 온 옥수수를 그 모깃불에 구워내 마당에 내놓은 평상위에 앉아서 먹었다. 그런 밤은 항용 서늘하였고 찌르륵거리는 밤벌레 소리와 개구리 소리로 와글거렸다.

 

가뭄이 들어 몇 년에 한 번씩 못에 물이 빠지고 그 바닥을 드러낼 때는 온 동네가 고기잡이에 나서기도 했다. 못 둑에는 커다란 휘장이 쳐지고 가마솥이 걸렸다. 남자들은 물 빠진 못에 들어가 고기를 잡고 여자들은 잡아온 고기로 매운탕을 끓였다. 남자들은 원뿔형의 커다란 대나무 바구니로 못의 바닥을 내리 덮쳐 그 속에 갇힌 고기를 건져 내거나, 앞쪽에 여러 개의 못이 박힌 창으로 흙탕물을 견디지 못하고 튀어 오르는 고기를 찔러서 잡기도 했다. 이때는 어린애만한 큰 고기들도 많이 잡혔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인기가 있는 것은 ‘궁자’라고 부르는 민물장어였다. 그 놈들은 그 크기가 보통 어른들 팔뚝만 해서 대야에 담으면 대야가 꽉 찼고, 워낙 힘이 좋고 표면이 미끈거려 어른들도 놓치기 일쑤였다. 궁자가 그렇게도 인기가 있었던 것은 단백질 공급원이 풍부하지 않던 당시의 시골에서 그에 필적할 만한 몸보신감이 흔치 않았기 때문이리라.


못 둑의 풀잎에서 푸른빛이 서서히 빠지고 못물이 조금씩 야물어지면서 가을은 찾아왔다. 아침이면 못에서 스멀스멀 물안개가 피어올랐고 한낮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단풍으로 울긋불긋 물든 산들이 그대로 못물에 비쳤다. 저녁이 되면 노을이 못 둑을 가득 덮은 살찐 억새꽃을 붉게 물들였고 아이들은 깨진 바가지나 구멍 난 냄비를 뒤집어쓰고 나무로 깎은 장난감 총을 든 채 그 억새밭을 누비며 전쟁놀이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서리가 내리고 산과 들판에 푸른 기운이 가시고 나면 누렇게 익은 벼들이 황금빛으로 출렁거리던 논들은 빡빡 밀어버린 중학교 남학생의 머리같이 그루터기만 휑하니 남았고 아이들은 그 빈 논에서 자치기를 하거나 오징어 모양의 금을 그어 놓고 서로 땅따먹기를 했다.


날이 좀 더 추워져 물을 대어 놓은 논이나 못에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산에서 캐낸 칡뿌리를 씹어대느라 새까매진 입술을 문지르며 직접 만든 팽이나 썰매를 들고 얼음판위로 몰려들었다. 썰매를 만든다고 쓸 만한 판자는 모조리 쫑치고 썰매 다리에 붙일 질 좋은 철사를 구하기 위해 멀쩡한 상다리를 헐어내거나 팽이 밑에 박을 베어링을 빼내기 위해 리어커 동테(바퀴)를 풀다 들켜 울음을 물고 쫓겨나오는 아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눈이 내리면 아이들은 눈 쌓인 못 둑의 완만한 비탈에 모여 비닐포대를 깔고 앉아 눈썰매를 탔고, 얇게 쪼갠 대나무를 여러 겹으로 포개 만든 활과 가느다란 시누대에 날카롭게 갈은 못을 박아 만든 화살을 들고 꿩이나 토끼 사냥에 나서기도 했다.


산골의 겨울밤은 길고 또 추웠다. 그 긴 겨울밤 동안 군것질거리가 거의 없는 아이들은 화로에 고구마를 구워 먹거나 무를 긁어먹으며 이른 저녁식사 후의 허기(虛飢)를 달랬다. 덮고 자던 이불이 벗겨져 한기를 느끼고 눈을 떤 새벽녘에는 컹컹 개 짖는 소리와 더불어 못에 언 얼음이 압력을 못 이겨 쩡쩡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정월 대보름은 설 못지않게 기다려지는 큰 명절이었다. 동네 한복판에 서있는 늙은 감나무에 매달린 스피커에서는 하루 종일 산불의 위험 때문에 달집놀이를 금한다는 이장의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청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앞산에다 커다란 달집을 짓고 저녁이 되기만을 기다렸고 아이들은 낮 동안 집집을 돌며 쳇밥을 얻어다 짚 볏가리 속에 아지트를 차려 놓고 저녁을 기다렸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동산(東山) 위로 연중 가장 크고 둥근 달이 떠오르면 “달집에 불이야!”하는 함성과 함께 달집에서 붉은 불길이 치솟고 아낙들은 일제히 달을 향해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손바닥을 비벼대며 소원을 빌었다. 아이들은 낮에 얻어다 둔 쳇밥을 나눠먹고 들판을 내달으며 가느다란 철사로 길게 손잡이를 단 구멍 뚫은 깡통에다 불을 담아 돌리는 쥐불놀이를 했다. 기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빨간 쥐불이 못물에 비쳐 일렁거렸다. 그리고 지신밟기 패들이 집집을 돌며 울려대는 요란한 꽹과리 소리와 징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기도 했다.


산골의 겨울을 그렇게 깊어 갔고 얼마 안 있어 또 다른 봄을 맞이하곤 했다. 그런데 이 못을 배경으로 한 몽롱하면서도 찬란한 내 유년의 기억은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의 갑작스런 한 사건을 계기로 크게 굴절을 겪게 되었다.


어릴 때는 대개가 그렇겠지만 우리는 위아래로 서너 살 터울은 그냥 다 친구였고 같이 어울려 놀았다. 그날도 아래위로 서너 살 터울의 아이들 대여섯 명이 어울려 물을 댄 논의 얼음판위에서 썰매를 타고 놀았다. 그런데 그 중 한 녀석이 못에 들어갔다. 못에는 얇은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그것을 밟으면 찍,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가는 금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얼음판 전체가 파도처럼 위아래로 파동을 쳤다. 그것을 보고 재미를 느낀 아이들이 모두 못으로 몰려갔다. 


모두들 조심조심하면서 얕은 못가를 배회했는데 나보다 세 살 아래인 한 아이가 갑자기 만용을 부려 썰매를 타고 못 한가운데로 질주를 했다. 처음에는 잘 건너가는가 싶더니 건너편 못가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지점에서 얼음이 꺼졌고 아이는 두어 번 자맥질을 하다가 얼음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한편, 당시 중학교 졸업반이던 그 아이의 형은 집에서 쇠죽을 끓이고 있다가 동생이 못에 빠졌다는 전갈을 받고 부리나케 달려와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못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동생은 이미 물속 깊이 가라앉은 후였고 형 또한 차가운 얼음물 속에서 급격하게 체온이 떨어지면서 입술이 새파래졌다. 그러는 사이 동네 어른들이 몰려와서 대나무 장대와 새끼줄을 던져 넣어주었으나 그 형은 아슬아슬하게 모두 놓치고 얼마 후 자신도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처음으로 옆에서 진지하게 지켜본 죽음이었다. 그 형언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는 어린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 이후 동네 어른들은 집집마다 아이들의 썰매를 찾아내 모두 도끼로 작살을 냈다. 나 또한 그 이후 어른이 될 때까지 썰매는커녕 그 못 가까이 가는 것조차 꺼려했고 못은 나의 인식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러는 사이 몇 그루 남아 있지 않던 못 둑의 나무도 모두 베어지고 못가의 얕은 수초지대마저 모두 준설(浚渫)되어 이제 못은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그 본래의 용도로만 남게 되었다.


내 의식이 30년 저 너머의 기억을 더듬고 있는 동안 서서히 땅거미가 내렸고 저 혼자 논둑 사이를 누비며 뛰놀던 딸아이도 춥고 심심하다며 귀가를 재촉했다. 서둘러 고향집으로 돌아가 어머니가 싸놓은 미꾸라지와 추어탕에 쓰일 우거지와 풋고추 따위를 트렁크에 싣고 시내로 차를 몰았다.


주위는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고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설렘 같기도 하고 아픔 같기도 한 서늘함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과연 저 딸아이는 테레비나 인터넷 게임 같은 문명(文明)의 이기(利器)에 의존하지 않고도 유년(幼年)의 넘쳐나는 심심함을 채워 나갈 수 있을까. 그리하여 궁극으로 인간이 기댈 곳은 결국 자연(自然)이며 자연이 뿜어내는 그 찬연한 빛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큰 위안임을 스스로 깨달아 갈 수 있을까....... 그나저나 언제쯤 저 낡고 퇴락한 고향집을 헐어내고 반듯한 새집을 어머니에게 지어드릴 수 있을까.”


갑자기 엑셀레이트를 밟은 다리에 힘이 들어갔고 차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2005년 10월 10일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 月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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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