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추억

아카시아 향기에 취해

월지 2007. 5. 13. 22:07

 

 

내게 오월은 언제나 아카시아 향과 함께 찾아왔다. 내 나이 스물하고도 셋일 때 길게 자란 머리를 자르고 논산 훈련소로 입대하였을 때도 그랬고, 그보다 앞서 내가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 밤늦은 하굣길 산모롱이에서도 그랬고,  내가 서른 한 해를 늙어 집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그것은 때로 가슴 저 아래 잠겨 있던 모호한 고독과 그 대상을 알 수 없는 막연한 그리움을 자극하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주체할 수 없는 흥분과 설렘으로 나를 내몰기도 했다. 어쩌면 저 오월의 아카시아 향이야말로 나로 하여금 그 긴 겨울의 고통을 버티게 한 기다림의 한 실체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것은 내게 고통이면서도 희열이었고 설렘이면서도 좌절이었다.

 


올해의 아카시아 향은 우연하게 나를 찾아왔다. 5월 9일이었나 보다. 밤 10시가 조금 넘어 퇴근을 하면서 옥동 공원묘지 앞을 차를 타고 지나가는데 내려진 차창사이로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한 그 향이 강하게 코끝을 찔러왔다. 순간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뭉클한 무언가가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익숙하면서도 언제부터인가 잊어버린 그 느낌..., 짧은 순간 그 실체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지금의 이 생활 - 하루 종일 서류더미에 파묻혀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종류의 다툼을 마치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어내듯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면, 어느 듯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어느 소용돌이 속을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이 모습...,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 이틀 후인 5월 11일. 나는 조금 일찍 퇴근하여 집사람과 딸아이를 데리고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삼호아파트 - 신복로터리에서 정광사쪽으로 조금만 가다보면 길가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 뒤쪽 조그만 저수지로 갔다. 예상대로 저녁이 되어 공기가 낮게 깔리면서 달콤한 아카시아 향이 진하게 풍겨왔다. 삼호아파트에서 이 저수지에 이르는 길가의 논들은 이제 모두 밭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저수지 위쪽으로는 물이 잡힌 논이 그런대로 남아 있다.

 

 


영문도 모른 채 따라온 집사람과 딸아이는 아카시아 향에 도취되는 것도 잠시. “왜 자신들을 여기로 데려왔느냐”고 묻는다. 내가 희미하게 웃으며 아무런 대답이 없자 집사람은 딸아이에게 밭에 심어진 온갖 종류의 야채에 대해 설명하기에 바쁘다. 나는 우두커니 못 둑에 앉아 어둠이 내리는 못물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4년 전 5월. 그러니까 2003년 5월 나는 집사람과 딸아이를 데리고 여기 이 삼호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2005년 5월까지 만 2년을 여기서 살았다. 4년 전 5월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따라 울산을 떠나간 이후 실로 16년만의 귀향이었다. 물론 그 중간 중간에 1~2년 정도 귀향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업에 몸담지 않은 학생으로서 부급구사(負笈求師)의 길을 떠도는 자의 임시적인 체류에 불과하였다. 4년 전 5월의 그 귀향은 더 이상 학생의 신분이 아닌, 집사람과 딸아이의 부양을 책임진 어엿한 한 가장으로서의 내가 실질적인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그 전까지 나는 내 나이 26살부터 37살까지 만 12년을 부산의 금정산, 내 고향 치술령, 서울의 관악산, 밀양의 재약산, 창녕의 화왕산, 부산의 백양산 등등 주로 산자락을 떠돌며 책 보따리를 짊어지고 스승을 찾아다니는 고시생의 삶을 살았다. 그 동안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았지만 가장(家長)으로서의 부양 및 동거의무를 외면하고 하루하루를 내 자신의 한계와 처절하게 직면하는 고독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 종장(終章)은 월드컵 경기가 한창이던 2002년 6월말부터 7월 초까지 4일간의 피 말리는 2차 시험과 같은 해 12월 초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확인한 “귀하의 이름은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라는 ARS전화응답기의 싸늘한 기계음이었다.


허무하였다. 맵고 쓴 세월 속에 12년을 유예하였던 내 젊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젊은 날을 송두리째 집어 삼킨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은 승자에게는 환한 미소를 지었지만 패자에게는 단 한 번 위안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내게는 패배의 쓴잔을 음미할 여유조차 없었다.


하늘만 쳐다보며 무지개를 좇던 자가 어느 날 굽어보게 된 발아래 현실은 참담하였다. 주위의 친구들은 최소한 나보다 10년은 앞서 가고 있었고 무엇보다 집사람과 딸아이에게 있어 그 동안 부당하게 유예되었던 가장의 부담을 이제부터라도 오롯이 짊어져야 한다는 의무감이 어깨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합격자 발표가 있고 불과 한 달도 안 돼 부산에 있는 변호사사무실에 취직을 했지만 모든 것이 어설프고 서툴렀다. 변호사도 이제 막 연수원을 졸업하고 개업을 한 상태라 아랫사람 다루는 것이 어설프면서도 가혹했고 나 또한 아직은 내가 내다는 식의 자존심이 남아 있어 사사건건 부딪치고 충돌했다.


노동자를 위한 인권변호사임을 자처하는 그 변호사는 직원들에게는 거의 매일 야근을 강요했고, 모든 의견의 개진에는 - 심지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적인 사실조차 - 확실한 근거를 요구하였다. 덕분에 나는 지금 같으면 1~2시간 내에 뚝딱 해치울 일도 하루 종일 끙끙거리며 씨름해야 했다(이 점에 대해서는 그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러한 혹독한 훈련 덕분에 나는 울산에서 최고로 통하는 민사 사무장의 한사람으로 클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점심식사를 하러 사무실을 나올 때마다 부딪쳐야 하는 한때 같이 공부했지만 합격하여 변호사 벳지를 달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동기, 선․후배들이었다. 그들만 보면 다 던져버리고 다시 도서관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불같이 일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아직도 진땀이 나고 쓴웃음이 난다. 하루하루가 실의와 좌절의 나날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날도 입사 3개월만에 자의반 타의반 그 사무소를 나오면서 끝이 났다. 


다시는 이 바닥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각오로 퇴사를 하였지만 사회경험이 없는 38살의 백면서생(白面書生)을 호락호락하게 받아 줄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내가 기댈 곳은 내가 나고 자란 고향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울산으로 오게 되었다.

 


살림집으로 삼호아파트를 잡게 된 것은 순전히 전세가 쌌기 때문이었다. 울산으로 이사를 결심하면서 거리의 가판대에 비치된 생활정보지를 샅샅이 뒤졌는데 무거동에서 아파트로는 제일 전세가 싼 곳 중 하나가 삼호아파트였다.

 


이사를 오고 난 후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는데 아파트 바로 뒤에 논이 보이자 집사람이 “여기가 시내라고 하는데 무슨 논이 다 있느냐?”며 투덜거렸다. 내가 “시내에 산도 있고 논도 있는 이런 곳이 오히려 사람 살기에는 더 좋다”고 설득을 해도 집사람은 막무가내로 “울산이 촌 동내이고 수준이 떨어진다.”는 그 때의 그 편견을 아직까지도 고집하고 있다.

 


삼호아파트는 지하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차를 대는 일이 보통 머리 아픈 일이 아니었다. 조금만 늦게 퇴근을 해도 차를 대지 못해 근처의 주택가까지 빙빙 돌아야 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출․퇴근이 모두 늦은 나로서는 아파트 단지 내에 차를 대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아파트 뒤편의 논을 따라 나있는 비포장길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는 아무리 늦게 와도 길가에 한두 군데 차를 댈 만한 공간은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그곳은 곧 나의 전용주차공간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거기서 은밀한 즐거움을 찾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자연의 냄새와 자연의 소리였다.


봄이 되면 흙냄새에 섞인 꽃향기가 진동을 하였고, 여름에는 싱그러운 풀냄새가 물 냄새와 더불어 서늘하였다. 가을이 되면 풀 시드는 냄새와 낙엽냄새가 싫지 않았고 겨울에는 싸아한 치약향같은 공기냄새가 청량하였다. 또, 봄부터 여름까지 논에서는 개구리 소리가 와글거리고 산에서는 뻐꾸기와 소쩍새가 화음을 넣었다. 가을이면 스르래미를 비롯한 온갖 풀벌레가 소슬함과 애잔함을 노래하였고 겨울에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바람이 긴 휘파람을 불었다.


그 냄새와 소리들은 하루 종일 사무실에 박혀 세상 온갖 갈등의 헝클어진 실타래를 푸느라 지치게 피폐한 나의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하루 중 밤늦게 차를 세우고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내려 오는 그 시간만큼 즐거운 때는 많지 않았고 그 순간만큼은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했다.


어떤 때는 그 즐거움을 더 많이 누리기 위해 퇴근할 때 술과 안주를 사가지고 가 차창을 내리고 1~2시간가량 알딸딸한 명정상태에 빠져 있기도 했다. 그런 때에는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았고 별로 가진 것 없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부자였다.


그로부터 벌써 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집을 사서 이사를 했고 집을 장만하기 위해 빌린 빚도 얼추 다 갚아간다. 그 동안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도 많이 생겼고 사무실에서도 어느 정도는 인정을 받고 있다. 월급도 처음 출발할 때보다 3~4배는 올랐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세월 동안 내가 가진 것이 없어도 누구보다 부유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체득하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은 욕심을 비우고 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큰 것 바라지 말고 순리대로 살아가되 하루하루 변해가는 자연의 빛과 소리에 눈과 귀를 열어두면 살아가는 모든 것이 즐거운 법이다. 그럼에도 이 단순하고 자명한 이치를 망각하고 모두들 서로 더 많이 차지하려고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거리는 것이 세상사의 어리석음인 것 같다. 그렇게 더 많이 차지하고 더 빨리 무언가를 이룬다고 할지라도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찾아오지 않는데...,


하기야 집사람도 아직은 더 큰 평수의 아파트와 더 높은 배기량의 차에 집착하고 딸아이도 아직은 요란한 것에 더 귀를 쫑긋하고 현란한 것에 더 눈을 반짝인다. 어쩌랴! 저들이 무겁게 매달려 있음으로 인해 내가 아직 공중으로 부양하지 않고 이 땅에 붙박여 살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저들도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그리고 극락과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상을 바라보는 저희 눈에 달려 있는 것임을,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몸소 깨달아 얻게 되는 것임을, 남편으로서 그리고 아빠로서 나는 강요할 수는 없지만 저들이 좀 더 빨리 깨달을 수 있도록 넌지시 그 세계를 보여주기만 할뿐이다.

 


내가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집사람과 딸아이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아파트 쪽으로 내려가고 서서히 날이 저물어 가면서 내가 한 소식한 이 검은 못물 위로 드리워진 아카시아 향기는 그 사이 더욱 짙어져 있었다.


2007년 5월 11일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 月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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