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추억

추억여행- 젊음, 절망, 그리고..., [밀양~창녕~합천~감포 여행기]

월지 2005. 10. 25. 15:38

2005년 1월 1일. 아직 2005라는 숫자가 입에 익지 않은 새해 첫날, 집사람이 “벌써 늦었다”며 달콤한 잠에 빠져 있는 나를 흔들어 깨운다. 지난 한주 술과 과로로 축적된 피로에 절어 비몽사몽하고 있는 의식의 틈새로, 어제 아침 출근길에 집사람이 “신정연휴에는 친구네랑 1박 2일 일정으로 합천에 빙어회 먹으러 가자”고 하는 말에, 아무 생각 없이 “그러지 뭐”하고 동의해 준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끝없는 후회가 밀려온다. "아이고! 이번 연휴에는 집에서 뒹굴뒹굴 하면서 평소에 읽지 못한 책이나 좀 읽고 싶었는데 또 다시 중노동이 시작되겠구나...,"

 

무거운 몸을 일으켜 대충 씻고 밥 먹고 10시 30분쯤 친구네와 합류하여 합천을 향해 출발하였다. 울산-언양간 국도를 지나자 새로 개통된 언양-상북간 국도가 연결되어 차는 시원하게 질주하였다. 그리고 당초 가지산의 해맞이 인파로 붐빌 것이라 예상되었던 울밀선(蔚密線) 구간도 시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눈 쌓인 영남알프스의 웅장한 능선들을 망막(網膜)에 새기고 길가에 진열된 얼음골 사과의 상큼한 향기를 콧속으로 집어넣으며 남명을 지났다. 석골사 들머리를 스치듯 지나고 가인(佳人)을 지났다.


가인마을 초입에 서있는 ‘알프스 산장’이라는 이름의 모텔을 가리키며 “혜수야! 저기 기억 나?”하고 딸아이에게 물었다. “아니 전혀 모르겠는데”라며 딸아이는 아이다운 망각(忘却)을 드러냈다. “왜 우리 수(秀)야가 6살 때 엄마․아빠랑 저기서 하룻밤 자고, 낮에는 저 건너편 개울에서 아빠 등에 올라타고 수영하고 놀았잖아. 그 때 찍은 사진도 있는데 기억 안나?”하며 옆에서 듣고 있던 아이 엄마가 거들었다. 그제서야 딸아이는 “응 기억나. 그 때 내가 아빠 등에서 이렇게 이렇게 수영을 했지”하며 손짓까지 해 보였다.


가인(佳人). 나는 1998년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을 여기서 머문 적이 있다. 마치 한해 농사를 끝내고 수확만을 기다리는 농부처럼 나는 여기서 그해 6월말부터 7월초까지 치러진 군법무관 시험 2차시험을 끝내고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은 온통 장밋빛이었고 나는 새장을 벗어난 새처럼 무한한 자유를 느꼈다. 지천으로 널린 사과와 감은 빨갛게 혹은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고 고시원에서 식사를 마치고 지팡이 하나 짚고 나서는 산책길이 좋았다. 때로 원우(院友)들과 어울려 투망질로 건져낸 민물고기로 끓여낸 매운탕에 들이키는 소주 맛이 좋았고 산책길에 들러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간다는 이유만으로 자주 모텔에 딸린 노래방을 2시간 넘게 공짜로 사용하게 해 주던 ‘알프스 산장’ 아주머니의 후한 인심이 좋았다. 나로 하여금 깊은 사색에 들게 해주던 ‘가인 예술촌’ 앞마당의 푸른 잔디와 나무그늘이 좋았고 철을 잊고 피어나던 도로가의 화사한 코스모스 꽃이 좋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지금 지나고 생각해 보니 가을에서 추운겨울로 넘어갈 무렵의 북미대륙에서 갑자기 여름 같은 온화한 날씨가 나타나는 현상을 일컫는 ‘인디안 섬머(Indian Summer)’에 지나지 않았다.


차는 계속 달려 밀양 시내를 지나고, 무안(霧安)을 거쳐 밀양과 창녕의 경계지점인 인교에 다다랐다. 나는 거기서 왼쪽으로 눈을 돌려 초동농공단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저 때가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고 소중한 한 때였던 것 같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집사람이 이죽거렸다. “남들은 한창 일할 나이에 그렇게 허송세월을 했으니 지금 이 모양 이 꼴이지...,” “눈에 보이는 성취로만 본다면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남들이 먹고 사는 문제로 정신없이 세월을 까먹고 있는 동안 나는 그래도 세상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삶과 죽음, 가치와 아름다움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시간을 가졌으니 남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소중한 보물을 가지고 있는 셈이지...” 내가 이렇게 항변하자, 집사람은 또 이죽거렸다. “하이고 그래 너는 좋겠다. 남들이 안 가진 소중한 보물을 가져서. 그 좋은 시절동안 마누라 고생은 바가지로 시켜놓고...” 쩝! 이럴 땐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몇 마디 더 거들었다간 뼈도 못 추릴 게 뻔하다.


나는 이곳 초동에서 1998년 9월말부터 1999년 8월초까지 대략 10개월을 머물렀다. 가인에서 3개월을 어영부영하며 지내다 보니 공부도 안 되고 용돈은 궁했다. “어디 놀면서 돈 벌 곳이 없나”하고 기웃거리던 차에 마침 원우(院友) 한명이 아르바이트 자리로 신청해 놓은 공장 경비(警備) 자리가 나자 “자신은 가기 싫다”며 누가 대신 가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내가 그 친구의 자리를 대신 가게 되었다. 당시에는 IMF 구제금융의 여파로 부도난 공장이 많았다. 은행에서는 담보로 잡은 부도난 공장을 경매로 처분할 때까지 관리해야 했고 이 업무를 용역업체에 수수료를 주고 맡겼다. 그리고 용역업체에서는 다시 나이 많은 할아버지들을 고용하여 공장의 경비를 맡겼다. 나는 당시 30대의 젊은 나이에 은퇴한 60대 할아버지들이 주로 맡아 하는 공장경비를 서게 된 것이다. 


당시 초동농공단지는 터만 닦아 놓았지 입주한 공장은 전체부지의 1/3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나마 가동되는 공장은 거기서 다시 절반도 되지 않았다. 공장이 들어서지 않은 공터는 시들어가는 잡초들로 무성하였고 길은 포장(鋪裝)이 되지 않아 먼지가 풀풀 날렸다. 내가 배치된 공장은 코르크를 이용한 목재를 생산하던 곳이었고 철골구조에 샌드위치 판넬로 지어진 공장, 창고, 식당 등 3동의 건물이 있었다. 식당건물에는 작은 방이 하나 딸려 있었다. 그 방에는 다행이도 전기장판이 설치되어 있어 춥지 않게 그해 겨울을 날 수 있었다. 내가 거기서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그 자리를 지키는 일과 며칠에 한번 전화로 “여기 대왕목재인데요. 별일 없습니다.”하고 용역업체에 보고 하는 것이 전부였다.


시간이 갈수록 지루하고 불안하고 초조한 날이 계속되었다. 거기서는 며칠이 지나도록 사람구경하기가 힘들었고 당초 시험장을 나설 때의 그 합격에 대한 확신은 시간이 갈수록 불안과 초조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외부와 나를 이어줄 교통편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거의 2시간에 한 번꼴로 다니는 시외버스는 그나마 저녁 7시경이면 끊어졌고 외출이라도 나갔다 올라치면 돌아올 일이 난감하였다. 그리하여 한달치 월급을 몽땅 털어 중고 오토바이를 한대 구입하였다. 털털거리는 그 중고 오토바이는 내게 단순한 오토바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와 세상을 연결해 주는 유일한 통로였고 내 짧고 부실한 다리를 연장(延長)해주는 사랑스런 애마(愛馬)였다.


나는 밥만 먹고 나면 애마를 타고 돌아다녔다. 세상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면 어김없이 땀을 흘리는 비(碑)가 있다는 무안골짜기의 사명대사 생가 터도 가보았고 고개 넘어 창녕의 부곡온천에 몸을 담그기도 했다. 옅은 초콜렛빛으로 물든 갈대 잎 무성한 긴 방죽 위를 달려 낙동강 본류 강변에 질펀하게 하게 펼쳐진 젖빛 백사장을 소요하기도 했고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창원의 주남저수지를 배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도 좋았던 것은 ‘초동못’이었다. 어릴 적부터 앉으나 서나 오로지 보이는 것은 산뿐인 환경에서 자라온 나에게 있어 큰 강을 끼고 유장하게 펼쳐진 평야지대는 경이(驚異)에 가까운 체험이었다. 그런데 그 넓고 평평하게 펼쳐진 논들의 파노라마 속에서 그저 좀 길고 약간 높은 논둑이라고 생각하고 오른 제방너머로 펼쳐진 그 풍경이란......, 그 넓고 비옥한 평야지대에 걸어서 한 바퀴를 일주하는데 30분은 족히 걸리는 넓이로 섬처럼 홀로 떠있는 그 코발트빛의 못은 한마디로 세상과 나를 비추고 마침내는 나와 세상을 삼켜버리는 거대한 거울이었다. 특히 초저녁 촉촉이 이슬이 내려 않은 갈대숲을 헤치고 바라보는 파도 한 점 없는 수면(水面)과 그 위로 사뿐히 내려앉은 달빛과 그 텅 빈 공간을 채우는 정적(靜寂)은 내 정신이 마침내 도달해야 할 어떤 경지를 엿보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월지(月池)라는 자호(自號)가 내 정신이 머물 한 풍경을 오롯이 담고 있는 것 같아 자못 흐뭇하였다. 


또 있다. 낙동강을 끼고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인근에 온천이 있어서 그런지 그곳은 유난히 안개가 많았다. 무안(霧安)이라는 지명이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곳의 안개는 저녁 무렵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하여 다음날 아침 해가 멀리 산자락으로부터 손바닥 한 뼘 높이로 떠오를 때까지 머물렀고 그 희고 작은 물의 입자들은 샌드위치 판넬로 지어진 공장 건물에 부딪치면서 물방울로 응축되어 밤새 땅땅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몽롱하면서도 아늑하고 눅눅하면서도 싸늘하고 둔중하면서도 예리한 그 어둠과 감촉과 소리는 서로가 서로를 휘감고 도는 태극(太極)처럼 한 덩어리로 어우러져 맵고 쓰고 떫은 삶의 한 단면(斷面)을 잘라내 보여주는 듯 길을 잃고 헤매는 자를 겁먹게 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1998년 12월 초가 되면서 합격자 발표일이 다가왔다. 합격자 발표일. 나는 며칠째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로 낙동강 본류로 이어지는 지천을 감싸 안고 이어진 길고 긴 방죽을 걷고 또 걸었다. 그사이 생각은 천당과 지옥을 수십 번 수백 번 오락가락 했지만 기다리는 소식은 오지 않았고, 그리하여 결국 그날 밤 12시를 넘기고 전화로 확인한 ARS에서는 “귀하의 이름은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라는 기계음만이 차갑게 들려왔다. 뒤통수를 한차례 세게 얻어맞은 듯 나는 멍하니 얼어붙었다. 그리고 짧은 순간 지난 7~8년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참으로 길고도 지루했던 형극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무참하게 쓰러진 세월이었고 허무하게 소진(消盡)된 젊음이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진지하고 간절한 절망(絶望)을 맛보았다. 술을 마셨다. 2ℓ짜리 페트병 소주 한 병을 안주도 먹지 않고 혼자 비웠다. 그러나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정신을 더욱 맑아졌다. 그 밤은 시간이 정지된 듯 길고 길었다. 나는 소리 없이 울부짖었고 그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아니 그 대상은 분명하였다. 그것은 바로 나였다. 도무지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었다.


내가 스스로를 용서하기까지는 한 달의 시간이 필요하였다. 합격자 발표일로부터 다시 한 달 후 시험성적이 발표되었다. 나는 합격선을 여유 있게 넘어서고도 상법에서 과락(科落)을 먹는 바람에 불합격이었다. 그리고 그해에는 유독 상법에서 많은 과락이 나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과락(科落)! 법대 4년을 졸업하고도 6년을 더 공부했는데 아직도 기본이 안 되어 있다니......, 채점관(採點官)들이여! 그대들의 평가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세월 내가 이 시험에 쏟아 부은 시간만으로도 나는 그대들의 평가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소!” 나는 나를 용서하기로 했다. “이번 시험은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그러나 나는 나를 용서했지만 내 주위에서는 나를 용서하지 않았다. 내 주위의 따뜻했던 시선은 더 이상 온기(溫氣)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나를 진정으로 절망시킨 것은 내가 불합격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 주위의 달라진 눈빛이었다. 그것은 내가 내 젊음을 불태워 온 유일한 명분(名分)의 상실이었다. “나는 내 주위에 빛과 영감을 주기 위해 이 길을 택했고 나는 한 발광체(發光體)이고 싶어 이 길을 걸어왔는데 이 주위의 차가운 눈빛은 무엇이란 말인가.......” 도무지 책(冊)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혹시 지금까지 내가 잘못 살아온 것은 아닐까.......” 나는 도무지 내 주위의 차가운 눈빛을 지금까지의 내 논리로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앞으로 나는 어떤 가치를 부여잡고 나의 길을 가야 한단 말인가.......” 나는 내 주위의 차가운 눈빛마저 설명할 수 있고 경멸에 찬 그들의 비웃음마저 포용할 수 있는 어떤 가치(價値) 혹은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視線)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이전부터 막연하게 삶과 인생에서 부딪치는 근본적인 의문에 궁극적인 해답을 줄 수 있을 것 같고 또 언젠가는 매달려 한바탕 씨름해볼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선(禪)과 화두(話頭)에 눈길을 돌렸다. 나는 그때까지 기거하던 그 식당 방 방문위에 그 마을의 지명을 따와 ‘오방토굴(五傍土窟)’이라고 커다랗게 당호(堂號)를 써 붙이고 선(禪)과 화두(話頭)에 관련된 책은 모조리 읽어 치웠다. 나는 깊이 침잠(沈潛)하였고 무섭게 몰입(沒入)하였다. 때로 며칠에 한번 용역회사에 해오던 불과 몇십 초간의 전화보고조차 성가시게 느껴졌고 한 달에 한번 정도 얼굴을 보게 되는 집사람과 딸아이까지 거추장스럽게 여겨졌다. 불가(佛家)에서 수행승에게 독신을 요구하는 그 깊은 뜻이 절실하게 마음에 와 닿았고, 남들이 다 하는 결혼이라고 별 생각 없이 집사람을 만나고 딸아이까지 낳은 내 성급함이 뼈에 사무치게 후회스러웠다.  그러는 한편으로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치웠고 책속에 저장되어 있던 엄청난 양의 지식들이 물이 스펀지에 빨려들 듯 내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목말랐고 내 독서 목록은 선과 화두를 뛰어넘어 명상의 세계로까지 영역을 넓혀갔다. 그 지점에서 오쇼(Osho Rajnish)를 만났다. 그리고 오쇼를 만나서야 이전의 막연했던 언어와 사유의 단편들이 퍼즐조각이 맞추어지듯 명쾌한 논리로 연결되었다. 나는 비로소 공(空)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모든 것은 텅 비어 있어 고정된 실체가 없고 나 역시 그러하다(諸法無我). 나[我]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면 나와 나 아닌 것과의 경계 또한 사라져버린다. 또 모든 것은 변하고 머물러 있는 법이 없다(諸行無常). 사람이 괴로운 것은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실체가 없는 나에 자꾸 매달리기 때문이다. 부나 권력이나 명예나 젊음 따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치 있는 것이라 여기며 쫓아가는 모든 것들도 따지고 보면 일시적으로 그 일부를 나의 것으로 만들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들이 영원한 나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들은 기껏해야 그것을 가졌느냐 가지지 못했느냐에 따라 살아가는데 조금 편리하냐 불편하냐의 차이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무엇을 그렇게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가. 놓아버려라.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그저 지켜보라. 저 둥근 달을 온전하게 비추고 있는 잔잔한 연못처럼.......,


그렇게 나와 사물이 공(空)한 이치를 어느 정도 깨닫게 되고 또 그런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게 되자 어느 듯 마음에는 평안이 찾아왔고 주위의 차가운 시선이 더는 괴롭게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는 이치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자 지난 수험기간 동안 과음한 다음날의 숙취처럼 지독히도 나를 괴롭히던 실체를 알 수 없는 몸의 고통도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이 무렵부터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영남알프스 일대의 주요 봉우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내게는 많은 의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 이전까지 나는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의 뒷산인 치술령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산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영남알프스의 수려한 준봉(峻峰)과 깊은 골짜기들은 그렇게도 훌륭하게 보였던 치술령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상은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알고 있는 세계보다 더 훌륭하고 멋진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자. 알지 못하는 많은 세계도 알려고 노력하자. 그리고 그것을 즐기자. 그렇다고 내가 아는 세계를 덜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내 의식을 감싸고 있던 촌놈의 껍질을 벗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자신의 세계만이 전부이고 최고라고 생각하는 그 촌놈의 의식을......,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그리고 1999년 8월초. 나의 경비업무는 끝이 났고 나는 마치 오랜 유배생활(流配生活)을 끝낸 것처럼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왔다.


의식이 5년 전의 기억을 더듬는 동안 차는 어느 듯 인교를 지나고 부곡을 지나 창녕에 이르고 있었다. 시각은 이미 점심때를 지나 있어 근처의 식당에 들러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차를 몰아 우포늪으로 향했다. 늪이 뭐냐는 딸아이의 물음에 집사람은 생태계(生態界)의 보고(寶庫)니 어쩌니 하면서 열심히 설명을 해줬다. 그러나 내 어릴 적처럼 소쿠리를 들고 바지를 무릎높이로 걷은 채 무성한 수초를 헤쳐 가며 직접 물고기도 잡아보고 그 잡은 물고기로 매운탕도 끓어 먹어봐야 늪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가치를 가진 것인지 체득하지 않을까 싶었다.


5년 전에 왔을 때의 우포늪은 비록 비포장길이긴 했지만 자동차로 늪 주위를 일주(一周)하며 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가본 우포늪은 생태계 보존차원에서 차는 주차장에 세워두고 늪까지는 도보(徒步)로 걸어가게 해 놓았다. 포근하던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 바람은 귀를 에는 듯했고 막상 추위에 떨며 걸어간 우포늪은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저 멀리로 얼음판을 까맣게 뒤덮고 있는 철새 떼가 보이긴 했지만 딸아이의 육안으로 보이는 건 점점이 박힌 검은 점들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아이의 기억 속에는 그저 평소 경험하지 못한 혹독한 추위와 규모를 짐작하기 힘든 큰 못만이 남을 터였다. 고작 이것을 보여주려 아까운 시간과 휘발유만 낭비했다니......,


다시 차를 돌려 이름을 알 수 없는 널따란 강을 끼고 합천을 향해 달렸다. 집사람은 우포늪에서 출발할 때 동석하게 된 친구 부인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 수다라는 것이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아니 나의 관점에서 보면 모르는 것이 정신건강에 훨씬 유익할 것 같은 일상사 시시콜콜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그녀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시종일관 깔깔댔다. 나중에는 머리가 띵하고 귀가 아플 정도였다. 차창 밖으로 유장하게 펼쳐진 수려한 강변의 풍경은 그녀들의 관심 밖인 듯했다. 확실히 남자와 여자는 뇌의 구조가 다른 것 같다.


차가 합천읍내로 들어가는 다리걸음에 이르렀을 때는 해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려면 2시간정도는 더 있어야 될 것 같았다. 우리는 해인사에 가보기로 했다. 읍내를 벗어나 어느 정도 달리자 만만찮은 풍광의 계곡과 골짜기들이 펼쳐졌다. 그 구불구불 이어진 계곡과 돌산은 국립공원이라는 이름이 아무 곳에나 함부로 붙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그런데 국립공원이라는 이름값이 그렇게 비싼 줄은 절 입구의 바리케이트를 통과하면서 알게 되었다. 주차료에 공원입장료, 문화재관람료 등등의 명목으로 무려 1만 7천의 돈을 뜯어갔다. 깊은 골짜기라 해는 이미 산 너머로 숨었고 햇볕이 들지 않는 골짜기는 이빨이 딱딱 부딪칠 만큼 추웠다. 그리하여 아직 두 돌이 지나지 않은 어린애를 동반한 친구네는 해인사 관람을 포기하였고 결국 우리 식구만 관람하게 되었다.


그런데 딸아이의 신발 한쪽이 없었다. 친구 차를 탔던 딸아이가 오는 길에 차에서 내려 소변을 보다가 신발 한쪽을 흘리고 온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딸아이를 등에 업었다. 살을 파고드는 매서운 추위도 추위지만 목을 옥죄고 등을 내리누르는 딸아이의 두 팔과 만만치 않은 몸무게는 관람을 고행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해인사와 그에 딸린 수많은 부속 암자들의 웅장한 절집 건물들은 그리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다만, 팔만대장경을 수장하고 있는 장경각 건물과 일주문 앞에 설치된 성철 스님의 사리탑은 그 과학적 정치성과 예술적 조형미에서 각질이 두껍게 앉은 내 심미안(審美眼)에도 약간의 울림을 주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합천호를 끼고 꾸불꾸불 이어진 길을 달려 합천호 상류에 자리한 새터 관광지에 도착한 시각은 저녁 7시. 호숫가에 위치한 모텔에 방을 예약하고 근처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식탁에 올라온 것은 빙어튀김과 빙어 회무침, 그리고 물이 담긴 접시 속에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살아있는 빙어였다. 팔딱팔딱 몸을 비트는 살아있는 빙어는 손가락으로 대가리를 살짝 튕겨서 기절시키고 그것을 통째로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는데 처음의 망설임과는 달리 먹을 만했다. 빈속에 소주와 매운 빙어회를 마구 털어넣은데다가 장시간의 운전으로 피곤해서인지 모텔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근처 식당에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오전 11시쯤 귀갓길에 올랐다. 국도와 88고속도로를 번갈아 타고 대구까지 나왔다가 최근에 새로 개통한 고속도로를 타고 포항까지 갔다. 그리고 다시 포항에서 구룡포를 지나 동해안을 끼고 이어지는 국도를 타고 감포에 도착하였다. 좁은 견문에서 비롯된 결론인지는 모르겠으나, 포항 구룡포에서 경주 감포를 지나 울산 정자에 이르는 이 국도보다 나은 바닷가 드라이브 코스를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감포항에 차를 세우고 방파제를 거닐었다. 딸아이와 나는 방파제 초입에 세워져 있는 허름한 대공초소(對共哨所)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좁은 콘크리트 제방 위를 걸었다. 그 제방은 방파제로 보기에는 너무 허술하고 담장으로 보기에는 그 용도가 의심스러웠다. 제방이 끝나는 지점에서 주저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딸아이는 “담배연기가 싫다”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수면 위를 어지럽게 배회하는 갈매기 떼를 보면서 나는 상념에 잠겼다.


내가 감포(甘浦)에 처음 와 본 것은 1987년 11월 말경으로 기억된다. 그때 내 나이는 스물하고도 둘이었고 캠퍼스는 연일 데모와 매캐한 최루탄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해 4월부터 시작된 학내문제를 이슈로 한 집회와 시위는 점점 더 그 규모를 더해가더니 6월에 이르러서는 대규모 거리시위로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6.29 선언이라는 독재정권의 항복문서를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그해 여름은 그 동안 독재정권의 억압에 눌려 갇혀 있었던 노사분규가 봇물처럼 터졌고 그해 가을부터 겨울까지는 대통령 선거의 여파로 시끄러웠다. 그리하여 1987년은 1․2학기를 통틀어 제대로 된 강의나 시험 한번 치러보지 못했고 도서관에 앉아 책과 씨름하는 인간은 시대의 아픔도 모르는 지독한 이기주의자로 낙인찍히는 그런 분위기였다. 나 또한 그 시절에는 피가 뜨거운 20대 초반의 청년이었고 헌법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는 민주주의나 법치주의를 나타내는 최소한의 징표조차 갖추지 못한 그 천둥벌거숭이 독재정권을 향하여 돌을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때 나는 막걸리 한 사발을 마음껏 들이킬 여유도 없을 만큼 가난하고 왜소하고 초라하였다. 어떤 친구들처럼 이념으로 무장하고 시위대의 선봉에 서서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를 외칠만한 용기도 없었고, “어느 시대, 어느 역사를 막론하고 시끄럽지 않은 세월이 있었던가? 나는 내 갈 길을 갈뿐이다”며 세상과 담쌓고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할 만큼 나의 길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나 또한 누구 못지않게 밤늦게까지 고민하였으되 결론을 찾지 못했고 방황하였으되 목적지를 찾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철저한 방관자로 남기에는 세상에 대한 애착이 너무 많았고 나를 따르라며 투쟁의 선봉에 서기에는 방향과 방법을 제시할 가치체계에 대한 지적연마(知的鍊磨)가 부족했다. 나는 그저 있으나마나한 한 부화뇌동자(附和雷同者)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나는 그 때 20대 초반이었고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20대 초반의 남자라면 누구나 직면하게 되는 ‘언제, 어떻게 병역의 의무를 이행할 것인가’의 문제 때문에 장기적인 계획을 잡을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해가 다 저물어 갈 무렵 나는 일단 군대부터 갔다 와야겠다는 다분히 유보적인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자, 어영부영하며 소모해 버린 지난 2년의 대학시절이 한 없이 후회스러웠고, 후회스러우면 후회스러운 대로 그런 내 젊은 날에 한 종장(終章)을 마련해 줄 필요를 나는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훌쩍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나는 그 여행에 절망여행이라는 거창한 타이틀까지 붙였다. 절망(絶望)은 분명 한 끝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한 시작을 의미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밤차를 타고 이리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한 친구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 친구는 이른 방학을 맞아 이미 귀향하고 없었고 나는 대전역으로 나와 하룻밤을 보냈다. 그날 밤 대전역에는 얼마나 거지들이 많던지......, 밤이 깊어갈수록 덥수룩한 수염에다 까만 뗏국물이 주르르 흐르는 거지들이 역 대합실을 찾아 들어 스팀보일러 위에 드러눕고는 그대로 노숙(露宿)을 했다. 나 또한 그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온전한 거지였고 대합실 나무의자에 드러누워 반쯤 뜬 눈으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나는 김천을 거쳐 봉화역에서 내렸다. 잠이 모자라 몽롱한 의식 상태에서 온종일 봉화의 이름 모를 들판을 헤매었고 그날 밤은 들판에 쌓아놓은 짚 볏가리 속에서 잠이 들었다.


그 다음날 나는 다시 중앙선을 타고 안동, 영천을 거쳐 경주에 도착하였고, 해질 무렵에는 버스를 타고 감포에 닿았다. 감포(甘浦)! 왠지 어감이 좋고 알 수 없는 끌림에 이끌려 도달하게 된 감포......., 그날 저녁 나는 마지막 여비를 털어 호사(豪奢)를 부렸다. 나는 어떤 허름한 여인숙에 들어 따뜻한 연탄보일러 방에서 깊고 단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나는 뚜렷한 실마리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온갖 생각의 터널 속을 달려 온 그 절망의 여행마저 절망해버렸다. 그리고 텅 빈 마음으로 방파제를 거닐며 떠오르는 태양의 영접을 받고 시커먼 연기를 힘차게 내뿜으며 줄지어 출어(出漁)에 나선 고깃배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발걸음을 돌려 빨랫줄처럼 길게 쳐진 철사줄 위로 오징어가 널려 있는 대공초소 옆 제방을 거닐었다. 제방 너머로는 한 무리의 갈매기들이 요란하게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배부른 갈매기들이 노는 모습이 아니었다. 어부들은 오징어의 배를 갈라 말리면서 부산물로 나온 내장을 바다에 버렸고 갈매기들은 그것을 서로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데 옆의 대공초소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그리고 다짜고짜 신분증을 요구하였다. 쑥스럽게 학생증을 내밀자 얼굴을 아래위로 내리훑더니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까지 열어보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세상은 한줌의 먹이로 아귀다툼을 벌이며 서로 싸우고 있고 그런 모습을 그저 지켜보는 객관적인 관찰자의 입장조차 세상은 용인하지 않는다.” 그 순간 번개처럼 내 머릿속을 치고 간 생각이었다. 그렇게 내 절망여행은 끝이 났다. 또 그렇게 내 나이 스물하고도 둘일 때의 젊은 날의 한 종장(終章)은 채워졌다. 또한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당시 유행했던 발라드풍의 유행가 가사들과 함께 내 젊은 날의 희미한 낭만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추억 속으로 깊이 가라앉았다.


우리는 다시 차를 몰고 봉길(奉吉)을 지나 양남으로 왔다. 그리고 다시 양남에서 외동을 거쳐 울산으로 가기로 했다. 양남에서 외동으로 이어지는 고갯마루를 넘어오니 저 멀리 서쪽 하늘을 빨갛게 물들인 해가 뉘엿뉘엿 기울며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2005. 1. 5.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 月池



*여행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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