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 동양

자야사시가

월지 2010. 10. 8. 13:44

子夜四時歌

자야사시가

 

李白

이백

 

 

 

 

 

秦地羅敷女 진나라 땅 나부(羅敷)라는 여인이

진지나부녀

採桑綠水邊 녹수(綠水)가에서 뽕을 따네.

채상녹수변

素手靑條上 흰 손은 푸른 가지를 휘어잡고

소수청조상

紅粧白日鮮 붉은 옷은 햇살을 받아 선명하네.

홍장백일선

蠶飢妾欲去 누에가 배를 주리고 있어 돌아가야 하나니

잠기첩욕거

五馬莫留連 태수님도 더 이상 기다리지 마세요.

오마막류연

 

 

鏡湖三百里 거울같이 맑은 경호(鏡湖) 삼백리

경호삼백리

菡萏發荷花 연꽃 봉우리가 꽃을 피우네.

함담발하화

五月西施採 오월에 서시(西施)가 연밥을 따니

오월서시채

人看溢若耶 구경꾼이 약야(若耶) 계곡에 가득 찼네.

인간일약야

回舟不待月 달뜨기를 기다리지 않고 배를 돌리니

회주부대월

歸去越王家 월나라 왕궁으로 돌아간다네.

귀거월왕가

 

 

長安一片月 장안에 한 조각 달

장안일편월

萬戶擣衣聲 집집마다 다듬이질 소리

만호도의성

秋風吹不盡 가을바람이 불어 그치지 않으니

추풍취부진

總是玉關情 이 모두가 옥문관 낭군에 대한 그리움일세.

총시옥관정

何日平胡虜 어느 날에나 오랑캐를 평정하고

하일평호로

良人羅遠征 우리 낭군 원정에서 돌아오려나.

양인나원정

 

 

明朝驛使發 내일 아침 역(驛)의 관리가 떠난다 하니

명조역사발

一夜絮征袍 하룻밤 사이 병사의 솜옷을 짓는다네.

일야서정포

素手抽針冷 바늘 쥔 흰 손이 이리 시린데

소수추침냉

那堪把剪刀 칼을 잡은 그 손은 어찌 견디리.

나감파전도

裁縫寄遠道 옷 지어 겨우 먼 길에 부쳐도

재봉기원도

幾日到臨洮 어느 날에나 임조(臨洮) 땅에 닿을까.

기일도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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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羅婦): 조(趙)나라 사람 왕인(王仁)의 아내가 바로 진나부인데, 진나부는 뛰어난 미인이었다. 어느 해 봄 진나부가 길가에 있는 뽕밭에서 뽕잎을 따고 있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조왕(趙王)이 그 아리따운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해 버려 연정을 느끼게 되어 줄곧 진나부에게 자기의 사랑을 받아 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진나부는 자기의 남편 왕인만을 생각하고 조왕의 끈질긴 유혹을 단호히 뿌리쳤다. 그리고 자기에게는 훌륭한 남편이 있다고 하여 남편을 자랑하는 줄거리의 노래를 불렀다. 뽕 따는 여인의 염결한 마음씨를 나타내는 건강하고 명랑한 이 노래를 맥상상[陌上桑: 염가나부행(艶歌羅敷行)이라고도 한다]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불리어지는 유명한 중국의 민요이다.

 

*오마(五馬): 태수를 아름답게 부르는 미칭(美稱)

 

*경호(鏡湖): 절강(浙江)성 뇌주(雷州) 호광암풍경구(湖光巖風景區) 안에 있는 호수. 연중 푸른색(碧綠色)을 띠며 거울처럼 맑고 깨끗하다 하여 경호(鏡湖)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당대(唐代) 시인 하지장(賀知章)이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한 곳으로 유명하다.

 

*함담(菡萏): 연꽃봉오리

 

*약야(若耶): 약야계(若耶溪), 완사계(浣紗溪) 또는 오운계(五雲溪)라고도 한다. 서시(西施)가 이곳에서 비단을 빨았다고 전해온다. 절강성 소흥(紹興)현에 있는 약야산에서 흘러내려 경호(鏡湖)로 흘러든다.

 

*서시(西施): 나무꾼의 딸로 저라산(苧羅山) 자락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며 자세한 성장배경은 알려진 것이 없다. 평범한 집안에서 출생하였지만 뛰어난 미모를 타고났기에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연정을 품었다고 전한다. 그녀가 살았던 마을에서 절세의 미녀로 소문이 나 같은 마을에 사는 여자들은 무엇이든 서시의 흉내를 내면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 생각했고 지병으로 앓던 심장병의 통증으로 찡그리는 서시의 얼굴까지 흉내를 냈다고 한다. 눈살을 찌푸린다는 의미의 서시효빈(西施效嚬), 서시빈목(西施嚬目), 서시가 가슴앓이를 한다는 의미의 서시봉심(西施奉心)이라는 말도 이러한 정황에서 유래되었다. 모두 본질을 망각하고 맹목적으로 남을 따라한다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오(吳)나라에 패망한 월왕(越王) 구천(勾踐)의 충신인 범려(范蠡)가 서시를 데려다가, 호색가인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치고, 서시의 미색에 빠져 정치를 태만하게 한 부차를 마침내 멸망시켰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오나라가 멸망하고 부차에 대한 죄책감으로 강에 빠져 자살했다고도 하며 자신을 요부로 훈련시킨 범려와 함께 제나라로 가 그곳에서 장사를 통해 큰 재물을 모았다고도 전해진다.

 

*옥관(玉關): 옥문관(玉門關)의 줄임말. 고대 중국의 서쪽 요지였던 간쑤성(甘肅省) 둔황현(敦煌縣) 부근에 배치되었던 관문. 한(漢)나라 때 서관(西關)을 지나 서역으로 가던 통로였다. 만리장성의 서쪽 끝에 있다.

 

*전도(剪刀): 원래 ‘가위, 즉 옷감, 종이, 머리털 따위를 자르는 기구’를 일컫는 말이나, 여기서는 운치를 살리기 위해 낭군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기 위해 지내고 있는 칼로 번역하였다.

 

*이백(李白): 이백(李白: 701년 ~ 762년)은 중국 성당(盛唐) 시기의 시인이며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촉나라 쓰촨 성에서 태어났다. 이백의 아버지가 중앙아시아에서 장사를 하던 무역상이었기 때문에 이백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25세나 26세까지 고향인 촉나라에서 살면서 동암자(東巖子)라는 선인과 쓰촨 성의 산들을 오르며 도교를 수양하였다. 25세나 26세에 고향을 떠나 강남(江南)을 여행하였으며, 아버지의 유산을 소비하며 몰락한 귀족의 자제들과 어울렸다. 45세에 현종의 칙령을 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어 장안(長安)에 머물렀으나 관리의 따분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44세에 헌종의 측근인 고역사(高力士)와 다투고 사직하였다. 사직 후에 낙양에서 산둥까지 두보와 함께 여행하였다. 54세에 다시 강남으로 돌아와 56세에 현종의 열여섯 번째 아들인 영왕 인(永王 璘)의 군대에 참여하였으나 영왕의 군대가 숙종에 의해 반란군으로 지목되어 이백도 야랑(夜郞, 지금의 구이저우 성)에 유배되었다. 다행히 삼협(三峽) 부근까지 왔을 때에 은사(恩赦)를 받아 다시 강남으로 돌아왔다. 만년에는 강남의 각지를 유람하였고, 62세에 안후이성(安徽省) 당도(當塗)의 현령(縣令)이었던 조카 이양빙의 집에서 사망하였다. 장강(長江)에 비치는 달 그림자를 잡으려다가 익사했다는 전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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