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 동양

승찬

월지 2006. 3. 28. 16:33
 

승찬(僧璨 : ? ~ 606)은 가계(家系)가 분명하지 않다. 혜가에게서 법을 이어받은 후 서주(西周)의 환공산(晥公山)에 은거하였다.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불교를 탄압할 때는, 일정한 주거지 없이 태호현(太湖縣)의 사공산(司空山)을 왕래하며 사람들 모르게 10여년을 지냈다.



승찬이 많은 대중들을 모아놓고 설법할 적에 한 사미가 있었다. 나이는 겨우 14세이고 이름은 도신(道信)이라 했다. 도신은 승찬 앞에 나와 절을 하고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의 마음입니까?"


이때 승찬이 되물었다.


"그대의 지금 마음 상태는 어떠한가?"


"저는 지금 무심(無心)입니다."


"그대가 무심이라면 부처님에게 무슨 마음이 있겠느냐?"


승찬의 말이 끝나자 도신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스님, 저에게 해탈의 법을 일러주십시오."


승찬은 다시 되물었다.


"누가 그대를 속박하는가?"


"아무도 속박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속박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대는 해탈한 사람인데 어째서 해탈을 구하는가?"


도신은 이 말에 크게 깨달음을 얻고 스승 곁에 8,9년 동안 있다가 길주(吉州)로 가서 구족계를 받고 돌아왔다. 이때 승찬이 도신에게 법을 전해줄 것을 선언하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花種雖因地  꽃은 땅을 인연하여 피어난다.

화종수인지

從地種花生  땅에서 꽃이 피기는 하지만

종지종화생

若無人下種  씨를 뿌리는 이가 없으면

약무인하종

花種盡無生  꽃이 피어날 수가 없다.

화종진무생


승찬은 수양제(隋煬帝) 대업(大業) 2년(606)에 입적했다. 그 후 당나라 현종이 감지(鑑智) 선사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탑호(塔號)를 각적(覺寂)이라 하였다.


그가 남긴 저술에는 그 유명한 "신심명(信심銘)"이라는 명저가 있다. 여기에는 그의 선사상(禪思想)이 단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서두에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란 구적이 나오는데, '지극한 도는 걸림이 없다. 오직 시비를 가리는 것을 싫어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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