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경직화된 이념의 폐해['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고]

월지 2013. 6. 13. 23:38

 

 

성리학은 남송(南宋)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유학의 한 갈래로서 이기설(理氣說)과 심성론(心性論)에 입각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중시하는 실천 도덕과 인격과 학문의 성취를 역설하였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기에 들어와 조선의 통치 이념이 되었고, 길재, 정도전, 권근, 김종직에 이어 이이, 이황에 이르러 조선 성리학으로 체계화되었다.

 

 

유학은 공자에서 비롯되어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맹자에게로 그 맥이 이어졌다. 그 이후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시련을 겪기도 하지만 한대(漢代)에 이르러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채택되면서 중국 한족 문화의 기본 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후한이 멸망하자 위진 남북조 시대부터 현실 도피적인 노장사상이 귀족 사이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었고, 이러한 노장사상을 매개로 외래 종교인 불교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隋)․당(唐) 대에 중국불교의 황금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불교가 현실과 유리된 논리와 논쟁으로 일관하고, 왕실과의 결탁으로 사회적 지위를 굳건하게 차지한 승려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등 그 폐단이 극심해지면서 불교의 지배이념으로서의 역할에 한계가 드러나게 되었다.

 

 

당의 멸망 이후 5대 10국의 혼란을 극복하고 송(宋)이 중국을 다시 통일하게 되었으나 초기에는 정치적인 내우외환에 시달렸고 북송 후기에는 왕안석이 개혁을 시도하면서 생겨난 여러 당파의 치열한 갈등, 파벌 싸움의 결과로 정치적 비관주의가 팽배하고, 지식인의 실질적 관심이 중앙에서 지방으로 옮겨가면서 철학적 관심의 초점 역시 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몇몇의 유학자들은 이전 유학(儒學)의 맹자, 중용 등이 인간의 본성과 도덕의 내면적 원천, 우주와 인간의 관계와 같은 중심 문제들을 다루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 미진한 부분에 대해서는 불가(佛家)와 도가(道家)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유학의 체계를 새로이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신유학(新儒學), 즉 성리학인 것이다.

 

 

성리학의 성립과정을 보면, 상수학적(象數學的) 지식을 바탕으로 주역(周易)을 연구하여 만물의 생성이 태극(太極)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는 수리(數理) 체계를 세운 소강절(邵康節, 1011-1077), 태극도설(太極圖說)을 통해 음양오행의 발생원으로서 태극을 주장하여 우주의 본체를 규명한 주렴계(周廉溪, 1017-1073), 독자적으로 '태허(太虛)'라는 개념으로 우주를 설명한 장횡거(張橫渠, 1027-1077), 주렴계의 태극(太極) 개념 대신 건원(乾元) 개념을 사용하여 유교의 본체론을 심화시킨 정명도(程明道, 1032-1085),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여 '기(氣)' 중심의 사상에서 '이(理)' 중심의 사상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역할을 담당한 정이천(程伊川, 1033-1107) 등 북송 오자(北宋 五子)를 거쳐, 주희(朱熹, 1130-1200)가 맹자 이후 1,400여 년간 끊겨 왔던 유교의 도통(道統)을 성리학에 다시금 접목시킴으로써 침체되었던 유교를 부흥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성리학은 기존의 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특징은 효제(孝悌)의 윤리를 위시한 인륜적 가치를 불변의 진리로 간주하면서도, 인간과 인간의 도덕적 당위에 대해 인간 세계의 범위를 뛰어넘어 끊임없이 순환하는 광대한 자연 세계의 지평 안에서  깊이 사유했다는 점이다. 이 시대의 유학이 신유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인간의 문제를 인간의 차원을 넘어 자연적 지평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자연 도덕주의, 도덕 형이상학). 주자는 유학의 부흥을 위해 당시 지배적 사상인 도교와 불교사상에 대응하는 형이상학적 우주론이 필요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이미 도교와 불교의 우주론과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에 익숙해 있었고, 그때까지 유학은 사람들에게 단지 수양(修養)과 위정(爲政)을 위한 학문으로만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유교 자체의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우주론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도교와 불교에 대응하는 형이상학적 우주론의 필요성과 당시의 어지러운 사회상에 대한 고민과 갈등의 해결을 위해 성리학이 도입한 것이 이(理)와 기(氣) 개념이다. 이와 기는 그 말은 비록 이전에도 있었지만 의미는 성리학에 의해 새롭게 부여된 것이다. 유교에서 이(理)는 본래 玉(구슬 옥)과 里(마을 리)가 합쳐진 형성문자(形聲文字)로 옥석의 맥리(脈理)를 말하였다. 옥을 다듬고 다스리는(가공하는) 사람은 그 맥리를 살펴보았는데 그 뜻에서 이(理)가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이(理)에는 형이상학적 개념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리학의 이(理)의 개념은 불교, 특히 화엄(華嚴)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화엄(華嚴)사상에는 4법계관(四法界觀)이라는 가르침이 있는데 그 내용은 현상계를 의미하는 사(事)와 본체계를 의미하는 이(理)의 상호관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이때의 이(理)는 공(空) · 무(無)의 뜻]. 주희는 유교의 입장에서 이 4법계관의 이(理)를 재구성하였다[이때의 이(理)는 우주의 보편적 척도를 의미].

 

 

첫째 이(理)는 우주의 보편적 절대적 잣대이다. 이기론이 말하는 대상은 외형적 사물이 아니라 삶의 의미와 잣대이다. 즉, 자연이란 인간이 본받아야할 모범으로써 최고의 선을 말하는 것이었다. 주자는 ‘이(理)에는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와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가 있고,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을 통해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에 이르러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소당연지칙이란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준칙, 즉 잣대를 가리키며, 소이연지고는 그렇게 된 까닭, 즉 준칙의 존재근거를 가리킨다. 전자가 잣대의 현실적 가치론적 측면(용:用)이라면, 후자는 그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측면(체:體)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둘은 이원화되지 않는다.

 

둘째, 이(理)는 존재가 지닌 뜻(의지와 의미)이다. 세상에 의미 없는 존재는 없고, 존재 없는 의미는 무의미하다. 모든 존재에는 뜻이 있으며, 그 뜻을 구현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천지의 운행과 변화, 그리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뭇 생명들은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생명과 자연은 하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첫 번째 이(理) 개념이 형이상학적 측면이라면, 이러한 두 번째 이(理) 개념은 신학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주자는 형이상학적 근원인 이(理)가 신학적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무척이나 신경을 썼다. 주자도 시경, 서경에 나오는 상제(上帝)로서의 인격신적 존재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공자께서도 '귀신은 공경하되 가까이하지 말라[敬而遠之]' 하였듯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격신적 존재의 우주적 역사(役事)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理)가 무위(無爲)냐 유위(有爲)냐를 놓고 일어난 논란이다.

 

 

한편, 기(氣)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구성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이 생명활동을 영위해나가는 에너지를 뜻한다('물질=에너지'의 에너지와 비슷한데 살아있는 에너지이다). 따라서 기란 스스로 생성, 변화, 소멸의 힘과 질서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외부의 개입이 없이도 생명활동을 영위해 나가게 된다. 그래서 기에는 우리가 흔히 하느님이라 칭하는 우주의 주재자가 없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기(氣)의 세계관을 대표하는 말이 바로 도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또 기의 세계관에서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바위나 그밖에 모든 것들이 같은 재질로 이루어졌으므로 똑같다고 보기 때문에 선악(善惡)이나 미추(美醜) 등의 가치기준이 애매해진다.

 

 

이와 같이 본래 기(氣)는 스스로 조화롭게 생명활동을 영위해나가는 에너지이다. 그러나 유가의 입장에서는 세상은 그 자체로 조화롭지도 평등하지도 않기 때문에 기(氣)에 대한 새로운 설명이 필요했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기(氣)는 맑고 흐리고, 열리고 막힌 편차가 있어서 순수하지 못하므로 조절되고, 통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기를 통제하기 위해 대두된 개념이 이(理)가 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신체와 정신활동은 일정한 표준과 이념에 의해 제재, 간섭, 교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스스로 조화롭고 평등한 기(氣)는 부조화와 불평등의 기로 그 의미가 바뀌었고, 이(理)는 단순한 다스림의 의미에서 우주의 척도라는 형이상학적 의미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한편, 고려 말에 우리나라에 도입된 성리학은 조선 초만 하더라도 사대부 계층에서 그 의례적 측면을 흉내 내는 수준에 불과하였고, 왕실이나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불교와 샤머니즘적 가치관에 물들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 중기에 이르면 중종 대 조광조의 소학운동(小學運動)에서 보듯 성리학적 생활규범이 일반 백성에게도 보급되기 시작하고 명종, 선조 대의 퇴계와 율곡에 이르면 성리학의 피상적 이해를 넘어 조선 성리학의 성립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심화된 단계에 이르게 된다.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발전과정에 있어 주요한 논쟁은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 등으로 이어지는데, 그 핵심쟁점은 이(理) 개념의 신학적 측면, 즉 이(理)가 무위(無爲)냐 유위(有爲)냐를 놓고 일어난 논란이라고 할 수 있다. 퇴계가 이(理)의 유위(有爲)을 확신하였지만, 율곡은 이(理)의 무위(無爲)를 철학적 사유의 출발로 보았다. 거칠게 말해서, 퇴계는 신의 직접적인 역사(役事)를 믿었고, 율곡은 신이 직접 역사하지는 않는다고 믿었다. 이러한 퇴․율의 차이가 조선 후기 퇴계의 후예라 할 수 있는 남인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이는데 앞장서고, 율곡의 후예라 할 서인 노론들이 이들을 탄압하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다른 한편,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수취체제가 무너지고 신분질서와 사회기강이 이완되어 율곡의 주장대로 경장(更張), 즉 사회 개혁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지배층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을 거부하고 오히려 신분질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혼란을 수습하려 했다. 그 이념적 도구가 바로 예학(禮學)이었다. 그것은 특히 국왕의 세습과정의 정통성과 맞물리면서 대를 이은 피비린내 나는 정쟁을 야기하였고, 부족한 관직을 놓고 학파와 지연이 얽혀 거의 대부분의 지식층과 지배층이 가담하여 벌이는 말과 글의 살벌한 투쟁으로 변질되었다. 처음에는 상대와의 공존을 전제로 한 붕당정치(朋黨政治)로 출발해서, 몇몇의 유력한 집안이 권력과 관직을 독점하는 벌열정치(閥閱政治)를 거쳐, 결국 한 가문이 거의 모든 관직과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勢道政治)로 타락하고, 결국 조선은 외세의 침략에 제대로 된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망국의 한을 씹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 책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는 송시열이라는, 후대에 극단적으로 상반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는 인물의 일생을 통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 성리학이 소모적인 예학 논쟁에 휘말리면서 겪게 되는 경직화된 이념의 폐해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유별난 이념적 경직성, 정치적 과잉성, 지역차별, 연고주의, 학벌주의, 국수주의, 민족적 폐쇄성 등 우리 민족이 아직까지 갖고 있는 후진적 고질병의 역사적 뿌리가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는 듯하다.

 

 

2013년 6월 13일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 月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