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달집에 불이야!

월지 2008. 2. 22. 11:52

 

 

사무실 문을 나서니 오후 5시 40분.

서쪽 하늘에 불그레한 낙조가 걸려 있다.

해가 많이 길어졌음을 실감한다.


옷을 갈아입고 가족과 함께 급하게 태화강 둔치로 향한다.

둔치가 가까워지자 농악대가 울려대는 풍물소리가 요란하다.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가운데

커다란 달집이 월출을 기다리고 있다. 

 


얼마 안 있어 달집에 불이 붙는다.

불은 순식간에 달집 전체로 번진다.


나이든 아낙들이 합장을 하고

달집을 향해 고개를 주억거린다.

따라 하기가 왠지 어색하고 쑥스럽다.

 


농악대가 타오르는 달집을 돈다.

풍물이 빚어내는 공기의 파동이 기분을 들뜨게 한다.

피부 끝에서 소름이 돋고 어깨가 저절로 들썩인다. 

 


한 추상(抽象)에 불과하였던

삼호동(三呼洞)이라는 동네이름이 

내가 사는 동네라는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해방감이랄까. 안도감이랄까.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어떤 편안한 느낌이 스친다.


그리고 갑작스런 각성이 일어난다.

세상의 온갖 갈등을 담은 서류더미 속에서

내 삶은 얼마나 속절없이 소진(消盡)되고 있었던가!

 


우뚝하던 달집은 내려앉고

서서히 흩어지는 사람들의 무리 속을 빠져 나와 강변을 돌아보니

동쪽하늘에 희뿌윰한 둥근달이 한참이나 솟아있다.


2008년 2월 21일

달은 못이 꾸는 꿈 月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