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 19일. 설 연휴 마지막 날이다. 이번 설은 처가에 가지 않아 마지막 날이 비게 되었다. 산에 중독이 된 탓일까. 1주라도 주말에 산에 가지 않으면 그 다음 주가 너무나 길고 힘이 든다. 전날 저녁 집사람에게 같이 산에 가자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더니 왠일인지 흔쾌히 동의를 했다.
늦은 아침을 먹고 12시쯤 집을 나섰다. 울산-상북간 국도를 시원하게 질주하여 들머리인 석남터널 입구에 도착하니 12시 50분. 곧바로 능선으로 이어지는 계단길을 치고 올랐다. 20분 정도 쉬엄쉬엄 계단길을 오르자 능선길이 나왔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부드러운 능선길을 따라 걸었다. 큰 고바위 없이 올망졸망한 작은 봉우리들이 계속 이어지며 단조로움을 덜어주었다. 지난밤 잠을 깊고 오래 자고나서 그런지 발바닥으로 전해 오는 땅바닥의 감촉이 감미로웠다.
부드럽게 내려앉은 햇살에는 봄 냄새가 묻어 있었고, 설 연휴가 짧아서 그런지 사람도 별로 없었다. 길은 고즈넉하였고 길가에는 철쭉나무가 지천이었다. 아무래도 봄이 오고 철쭉꽃이 무더기로 피어날 때쯤에는 다시 한 번 와야 할 것 같다.
오후 2시 50분 능동산 정상에 올랐다. 밋밋한 둔덕인데다 잡목이 둘러싸고 있어 조망은 별로였지만 어머니 품속 같은 후덕함이 있었다.
정상에서 사자평 방향으로 10분쯤 완만한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오자 쇠점골 약수터가 나왔다. 배낭을 부리고 라면을 끓여 늦은 점심을 먹었다. 제일 신이 난 것은 역시 딸아이다. 제일 좋은 것은 언제나 제 차지다. 내가 ‘일 병신(病身), 밥 장골(長骨)’이라고 딸아이를 놀렸다. 딸아이는 그 뜻은 모르면서도 그것이 저를 놀리는 말이라는 것은 알아듣는 듯 하얗게 눈을 흘긴다.
오후 4시 배낭을 챙기고 일어섰다. 임도를 따라 배내고개 쪽으로 얼마를 걷다가 다시 능동산 정상 쪽으로 올라붙었다. 갑자기 누렇게 시든 억새군락이 펼쳐졌다. 문득 파릇파릇한 봄나물이 돋아나는 어느 날 여기다 딸아이가 좋아하는 돗자리를 펼쳐 놓고 따스한 봄볕을 희롱하고 싶다는 유혹이 일었다.
얼마 후 올라왔던 길을 만났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밟아 왔다. 그러다가 처음의 계단길이 얼마 남지 않은 지점에서 나는 갑자기 왼쪽으로 이어진 급한 능선길로 방향을 틀었다. 딸아이와 집사람이 의아해 했지만 나는 바위벼랑이 수려한 그 능선을 꼭 밟아보고 싶었다.
길은 제법 가팔랐고 수려한 바위벼랑이 이어졌다. 딸아이와 집사람의 안전을 고려하여 능선을 비껴가는 길을 따라 내려왔다. 처음에는 제법 뚜렷하던 길이 조금씩 희미해지더니 마침내는 길 없는 급경사의 사면으로 이어졌다. 능선에서는 이미 한참이나 벗어난 상태라 되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길도 없는 가파른 사면을 따라내려 오자 뒤따라오던 딸아이와 집사람이 입이 한발이나 나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나이가 들어갈수록 산에 가기 싫어하는 딸아이는 한건 잡았다는 듯이 산행 무용론을 기세 좋게 설파(說破)하였다.
이런 경우를 다 된밥에 재 뿌렸다고 하나..., 처음 올라갔던 길을 끝까지 되밟아 내려왔으면 모두가 만족하는 산행이 되었을 것을..., 그 놈의 못 말릴 호기심 때문에 욕을 한 바가지나 얻어먹어야 했다. 가파른 계곡을 따라 내려와 휴게소가 눈앞에 보이는 24호선 국도에 이르니 저녁 6시. 저녁 어스름이 스멀스멀 내려앉고 있었다.
2007년 2월 19일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 月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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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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