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구름이 나즈막히 내려앉은 길을
1시간을 넘게 달려온 버스는 2004년 7월 17일 9시 30분경
우리 25명의 세월님들을 경주시 산내면 소태마을 어귀에 내려놓았다.
포장도로에서 약 20여m를 올라가자
상수원으로 쓰이는 것으로 보이는 작은 연못이 나타났고,
거기서부터 오늘의 산행이 시작되었다.
솔향기와 눅눅한 흙냄새
가득한 완만한 경사길을
30여분 정도 오르자 작은 봉우리가 하나 나타난다.
대장님 일행이 지도를 꺼내들고 방향을 가늠하고 있다.
아무래도 들머리를 잘못 잡으신 모양이다.
덕분에 한개비의
담배연기를 느긋하게 즐길 수 있었다.
연기의 폐해를 최대한 줄이고자 멀직이 앉아 담배를 물고 있는데
샹하이님이 담배 동지를
만났다며 반가워 하신다.
잠시의 휴식후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세월이 길게 행렬을 지어 앞으로 나아간다.
뱀의 등처럼 길게 이어진 산마루는
크고 작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땀은 비오듯
쏟아졌지만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있어
이 단조로운 산행길을 견딜만 하게 했다.
어느듯 앞서 가던 분들이 모두 시야에서 사라지고
뒤에서 따라 오던 몇 안되는 분들도 보이지 않게 되자,
자연스럽게 나 홀로 산행이 시작되었다.
군데군데 피어난,
원추리와 나리꽃,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저리 몸을 누이는 키 작은 풀들을 밟으며,
저절로 마음이 푸근해져 나도
모르게 시심(詩心)에 빠져 들었다.
歲月易歌高 세월이 좋으니 노랫가락 소리 높고
세월이가고
月池滔簡多 달 드리운 못에 물이 넘치니 사연도
많다
월지도간다
拔暗隱佛孤 어둠을 이긴 숨은 부처 외롭다 하여도
발암은불고
棄分異造唾 같고
다름을 분별하는 마음 버리고 에퉤퉤 침이나 뱉자
기분이조타
나홀로 지적유희(知的遊戱)를 즐기며
제법 가파른
비탈길을 기어 오르느라 비지땀을 흘리는 사이
후미조 무전기를 맡으신 겨울사랑님, 그리운님,눈꽃님, 망각님 등이 쫓아 오셨다.
오늘 처음 뵙는 그리운님이
"아! 월간지 아저씨군요?"하며 아는 체를 하셨다.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아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물어보니
1달에 한번쯤 나오니 월간지 아저씨란다.
"그렇다면 거기는 얼마나 자주
나오시냐?"고 물으니
3달에 한번쯤 나오신단다. 그래서 내가 한방 날렸다.
"그렇다면 거기는 계간지 아줌마군요"
그리운님과 망각님은 부부셨는데 참 재밌는 커플이었다.
한분은 사진을 찍고, 한분은 옆에 붙어서서
"이꽃은
무엇이고, 저꽃과는 어떻게 다르냐"며 연신 질문공세다.
아무래도 자리를 피해 주어야 할 것 같아 "먼저 가시라"고 하니,
"월지님 페이스가 나에게 딱 맞다"며 한사코 같이 가자고 하신다.
덕분에 꾀꼬리같은 그리운님의 낭랑한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한번도 자신의 속살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 온전한 육산(肉山)이라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길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걸을 수 있었다.
다만 다음 번 산행때 동행이 되면
진시황과 그의 아버지 여불위의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는 부채를 안게 되었지만 말이다.
가는 길 중간중간에 야생화 촬영에 열중하신 대운산장님을 뵐 수 있었다.
대운산장이라 하여 구레나룻 덥수록한 탈속의 산꾼을 연상하였는데 님은 앳되고 소탈해 보였다.
아무래도 닉네임이 님의 진면목을 다
담아내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것 같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능선길에서
이정표라고 할 만한 것이라고는 고압선 철탑밖에 없었다.
이 고압선 철탑을 통과하여 약 5분 정도를 더 가니 앞서간
세월님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이때가 12시 7분이었는데
늦게 도착한 죄로 허겁지겁 밥을 쑤셔넣고
막 한모금의 담배연기를 빨아들일 쯤인 12시 30분경,
대장님은 야박하게 오후산행의 출발을 명하셨다.
들머리를 잘못 들어 허비한 시간과
심상치 않은 날씨를 고려하신
듯하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다시 얼마를 더 걸었을까?
이 산에 들어 처음으로 나타난 암벽앞에 이르렀을 때,
시커먼 구름이 주위를 감싸더니 우르르 하는 천둥소리와 함께
갑자기 굵은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두 방울에 불과하던 것이
세찬 바람과 함께 순식간에 억쑤같이 퍼붓기
시작하였다.
등산로는 어느새 작은 도랑으로 변하고
안경은 뿌였게 성애가 끼어 한치 앞도 분별하기 힘들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오로지 정상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산의 또다른 모습이 거기 있었다.
오후 3시경
그리운님,망각님, 거사님
등과 함께
해발 1,013.5m 문복산 정상에 올랐다.
대장님이 비를 흠씬 맞고 후미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장이라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를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정상에서 준비해간 물병을
모두 비우고 바로 하산을 시작하였다.
키 작은 관목의 수풀을 헤치고
미끄러운 진흙길과 거친
자갈길을
행여 넘어질세라 조심조심 걸어 내려왔다.
얼마를 내려왔을까?
대장님 일행도 시야에서 사라지고
거사님과 나만 남게 되었을 즈음
문득 계곡물을 나타났다. 목을 축이고 부족한 니코틴을 보충하였다.
파란 담배연기가 눅눅한 대기속으로 구수하게 퍼져나갔다.
어느듯 빗줄기는 가늘어지고
거추장스럽던 비옷을
벗어버리니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다시 30분쯤을 더 걸어 내려오니
가파르던 경사가 갑자기
완만해졌다.
두 계곡의 물이 만나는 합수지점에 이르자
앞서 갔던 대장님, 태풍님, 대운산장님 등이 알탕을 즐기고 계셨다.
모두들 폭포수를 뒤집어 쓰고 알탕을 하라고 했지만,
아직 남은 길이 멀고 이 아래에도 알탕할 곳은 많다는 거사님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거기서 다시 5분 정도를 더
걸어내려 오니
길가에 '가슬갑사지(嘉瑟岬寺址)'라고 씌인 작은 비석 하나가 서 있었다.
그러나 어디쯤이 절 자리였는지는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계속 둥그렇게 휘돌아 나가는 계곡 옆길을 따라
휘적휘적 걸어내려 오니 갑자기 인가(人家)가 눈에 들어왔고,
마을로 접어들어 어느집 마루위에 걸린 벽시계를 보니 4시 3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을 옆을 흐르는 계곡물에 옷입은 채로
풍덩 뛰어들어
알탕을 즐기고 나오는데 거사님은 그제서야 등산화를 벗고 있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자니
한창 소진(燒盡)되고 있을 하산주가
눈에 아른거려 견딜 수가 없다.
거사님을 뒤에 남겨두고 부리나케 달려 내려오니,
천문사 쪽으로 가는 다리 아래에서 하산주 자리가 펼쳐져 있었다.
무용님, 태풍님, 겨울사랑님 등
세월의
내노라는 주당들 틈에 끼어
오늘 걸어온 길을 되뇌며 마시는 맥주맛이란
셋이 마시다 셋 다 죽어도 모를 지경이었다.
오후 5시부터 1시간 동안 계속된 술자리는
결국 준비한 술이 모두 바닥남으로써 끝났다.
조금만 더 마셨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을 안고 버스에 무거운 몸을
실었다.
그 마음을 어떻게 아셨는지 하산주 자리에서 멋들어진 노래 한곡과 함께
우리에게 아이스크림까지
선물하셨던 바꿔님이 짜짜잔 곡주 한병을 꺼내들고,
회심의 미소를 지어셨다. 바꿔님! 멋째이~~
제일 먼저 술을 청한 것은 물론 나였다.
불콰해진 눈으로 창밖을 보니,
3주전에 올랐던 쌍두봉이 씌익 미소짓고 있었다.
점점 취기가 올라 불그레해진 내 망막위로
오늘 내가 밟고 만지고 맡고
느끼고 맞고 마셨던
흙과 나무와 꽃과 바람과 비와 술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좀처럼 그 속내를 내보이지 않던 도도한 오늘의 이 산을
향해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기, 창문닫아라!
술깰라!
2004년 7월 19일
달을 품은 연못 月池
*산행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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