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머리에서 가슴으로['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월지 2014. 3. 6. 15:39

 

1930년대, 바람이 거센 동 트기 직전의 항구도시 피레에프스의 한 카페. 나는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린다. 볼세비키 혁명 때 친구 스타브리다키스가 카프카스로 박해받는 동포들을 구하러 떠난 뒤, 몸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몸을 써서 노동하며 삶을 깨우치기 위해 크레타 섬에서 잠시 중단되었던 갈탄광 채굴을 다시 시작하기 위함이다.

 

단테의 신곡에 막 몰두하려는 때 누구가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보니 거의 60대의 남자가 유리문 너머로 나를 보고 있다. 남자는 다짜고짜 들어와 자신을 함께 데려가라고 요구한다. 생각지도 못할 수프를 만들 줄 아는 요리사이자, 꽤 괜찮은 광부이며, ‘산투르’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이 남자. 바로 알렉시스 조르바이다. 나는 그의 도발적인 말투와 태도가 마음에 들어서 그를 갈탄광의 채굴 감독으로 고용한다.

 

크레타 섬에서 갈탄을 캐는 동안 나는 점차 조르바란 인물에 이끌려가고, 조르바는 오르탕스 부인과의 열정으로 생에 활기를 띄게 되는데 갈탄광은 경제성이 없어서 자금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조르바는 수도원이 있는 산꼭대기의 삼림을 벌목해서 돈을 벌자는 제안을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목재를 지상으로 운반할 시설물을 설치해야 하데 조르바는 얼마 남지 않은 자금을 털어 재료들을 사러 이웃 도시로 간다. 조르바는 거기서 젊은 여자의 유혹에 팔려 시간과 돈을 모두 날리게 된다.

 

주인의 돈을 탕진한 조르바는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수도원에 올라가 수도원장과 삼림을 헐값에 살 수 있도록 담판을 짓는다. 그 과정에서 수도원의 폐쇄성과 금욕과 수도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수도승들의 위선과 탐욕과 살인을 목격하게 된다. 분기탱천한 조르바는 광인 자하리아 수도사로 하여금 수도원에 불을 지를 것을 종용한다.

 

천신만고 끝에 산정에서 내려오는 케이블과 철탑의 각도를 연구해서 목재 운반설비를 마치고 개통식을 하는 날, 마을 사람들과 축도를 해주려고 산을 내려온 수도승들 앞에서 예기치 않은 사고가 터진다. 케이블을 타고 내려오는 동안 목재들이 그 가속도 때문에 불꽃에 그을리고 철탑들이 꺾여서 처박힌 것이다.

 

마을 사람들과 수도승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고,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파국에 둘만 남은 나와 조르바. 모든 것이 깡그리 날아가 버리고 어긋났을 때 찾아온 묘한 해방감. 잔치를 하려고 준비해두었던 양고기를 불에 굽고 술을 따른다. 둘은 밤새 술을 마시고 나는 조르바의 춤을 배우며 그의 언어와 자유로운 영혼을 이해한다.

 

이상이 이 책 ‘그리스인 조르바’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이미 조르바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다. 주로 오쇼 라즈니스의 글을 통해서였는데 조르바야말로 살아있는 붓다라는 것이었다. 오쇼의 말로 이해한 조르바는 대단한 아우라에 휩싸인 근엄하고 성스러운 존재였다. 그런데 막상 이 책을 통해서 접하게 된 조르바는 좌충우돌하고 허랑방탕한 일개 부랑자에 불과하였다. 오히려 그런 조르바의 모든 기행(奇行)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소설 속의 '나'야말로 더 대단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하여 지금 여기 생생하게 살아있는 삶,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역시 조르바는 현재를 가슴으로 살아가는 대자유인임이 분명하다. 이 땀내 물씬 풍기는 부랑자 앞에서, 부, 권력, 지위, 지식, 명성 따위 세속적인 가치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 마음이 행복할 때면 자신이 사랑하는 악기인 산투리를 치며 즐거워하는 조르바, 외모를 따지지 않고 모든 여성의 아름다움을 직시할 줄 아는 조르바, 넘치는 자신의 감정을 춤을 통해 온몸으로 표현할 줄 아는 조르바.

 

헤아리기 힘든 사상과 복잡다단한 진리가 죽음 앞에 무력하고 온갖 관계 속에 꽁꽁 묶여 있는 인간에게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조르바는 머리로 고민하고 애태우는 법이 없다. 그는 몸으로 고민하며 몸으로 생각한다. 그의 몸부림이야말로 지리멸렬한 삶에 대한 저항이며, 자유를 위한 투쟁인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성스러움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일그러진 표정에? 법당 안에 장엄하게 모셔진 불상의 온화한 미소에? 아니다. 그것은 어디에나 있다. 그것은 바위틈을 졸졸거리며 흐르는 시냇물에도 있고, 보도블럭 사이로 고개를 내민 이름 모를 풀잎에도 있고, 바람 부는 황량한 들판에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 현재를 사는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생각에서 몸으로, 지금 여기를 살라. 나는 이 책을 이렇게 읽었다.

 

2014년 3월 6일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 月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