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및 여행기

그곳에는 정지된 시간이 햇살에 바래고 있었다[칡대밭골 산행기]

월지 2010. 7. 19. 00:39

매봉 오름길

 

산꾼에게 산은 종교이다. 산꾼에게 산은 기도이고 위안이며 안식이다. 산꾼에게 산은 정신이 아니라 육체이고 지성이 아니라 감성이다. 산은 빛과 소리와 냄새와 촉감으로 산꾼에게 강림한다.

 

매봉 오름길 - 비에 젖은 낙엽이 융단처럼 부드럽다

 

산에 드는 날 산꾼은 온몸의 감각이 일어서고 그 감각에 깊이 새겨진 기억과 그 기억에 터 잡아 펼쳐지는 새로운 추억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잠을 설친다. 산으로 달려갈 때 산꾼은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가는 듯 발걸음은 가볍고 새로운 정인(情人)을 만나러 가는 듯 가슴은 부풀어 오른다. 그리하여 산꾼에게 산은 오래된 친구이자 새로운 정인인 것이다.

 

매봉

 

산은 계절마다 새로운 옷을 갈아입지만 특히 여름 산은 날씨만큼 변덕스럽고 변덕스러운 만큼 다채롭다. 산이 다채로울수록 산객의 가슴은 황홀하다. 그리하여 여자의 변덕은 유죄이지만 산의 변덕은 무죄이다.

 

땅바닥에 지천으로 깔린 산거울

 

태백에서 분기한 낙동정맥은 동해안을 따라 남으로 내달리다가 가지를 뻗어 영덕과 포항 사이에서 동대산, 내연산, 향로봉, 매봉 따위의 우뚝한 봉우리를 솟구쳐 놓았다. 그리고 그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는 복잡다기한 등고선이 이어져 있고 그 등고선이 오목하게 들어가는 곳마다 눈부신 비경의 골짜기들이 새겨져 있다.

 

산허리로 이어진 자전거길

 

오랜만에 연하고질의 산벗들과 함께 저 오목한 등고선이 새겨놓은 골짜기 중 하나인 칡대밭골 답사에 나섰다. 이번 산행이 특히 좋은 것은 해발 600미터 남짓한 내연산 수목원에서 출발하여 해발 816미터의 매봉까지 200미터 남짓한 고도만 극복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모두가 완만한 내리막이어서 덥고 습한 날씨 속에 고도를 높이기 위해 지불해야 할 여름 산행의 다양한 공물(供物) - 온몸을 적시는 비지땀과 턱까지 차오르는 가쁜 숨과 목구멍이 갈라지는 듯한 갈증 따위 - 이 면제된다는 점이다.

 

시가 있는 숲속 - 점심식사 장소

 

이러한 면세특권(免稅特權)을 알아 차렸음일까. 많은 회원들이 산행참가를 신청하였고 14명의 회원이 3대의 승용차에 나눠 타고 오전 7시 30분쯤 울산을 출발하였다. 경주와 포항을 경유하여 내연산 수목원에 도착하자 비가 내렸다.

 

꽃밭등 - 이곳에서 향로봉으로 가는 길과 칡대밭골로 가는 길이 갈린다

 

모두들 우의를 갖춰 입고 완만한 능선을 따라 매봉으로 올랐다. 빗물에 젖은 낙엽이 고급 카펫을 밟는 듯 푹신하였다. 매봉을 지나자 비는 그치고 울창한 참나무 숲 사이로 잔잔한 안개가 깔렸다. 지면 위로 융단처럼 펼쳐진 산거울의 푸르름과 그 위를 떠도는 하얀 안개가 선계(仙界)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칡대밭골 계곡 직전

 

능선을 벗어나자 산허리를 따라 조성된 자전거 길이 일정한 고도를 유지하며 부드럽게 이어졌다. 산모퉁이를 돌아 산모롱이로 이어질 때마다 길은 까까머리, 까만 교모, 후줄근한 교복 차림으로 열심히 페달을 밟던 중학교 시절의 저 자전거 통학로와 그 통학로에서 벌어지던 악동들의 크고 작은 장난들을 환기시켰다. 그 풍경들은 누렇게 빛이 바랜 흑백사진처럼 남루하면서도 편안하였다.

 

칡대밭골 계곡

 

그 자전거 길이 끝나는 곳에서 부실한, 그러나 그 부실함으로 인하여 더욱 풍성한, 점심을 먹었다. 다시 능선 길로 들어섰다. 멧돼지들이 나무뿌리를 캐먹기 위해 흙을 마구잡이로 파헤쳐 놓았다.

 

칡대밭골 계곡

 

꽃밭등에서 길이 갈렸다. 능선길을 따라 계속 전진하면 향로봉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우리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선두가 처음에는 희미한 길을 따라가다가 왼쪽의 계곡을 향해 내려가는가 싶더니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의 위쪽으로 올라갔다.

 

폭포

 

조금 따라가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쪽 방향으로 가면 계곡에서 멀어질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제일 후미에서 걷던 달빛소리님이 자신은 계곡으로 바로 내려가겠다고 했다. 의구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폭포

 

선두는 자칫 길도 없는 계곡으로 내려섰다가 가파른 절벽이라도 만나게 되면 적지 않은 일행의 안전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걱정 때문에 산 위쪽의 우회로를 찾아가는 것이겠지만 전체적인 산세로 보아 계곡이 급경사를 이루지는 않을 듯싶었다.

 

칡대밭골 계곡

 

그리하여 후미의 4명은 바로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당초의 예측이 적중한 듯 계곡은 보석처럼 빛났다.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길이 막상 계곡으로 내려 오자말자 시냇가를 따라 뚜렷하게 이어졌다. 때로 시냇물을 가로지르며 이어지는 길은 부드럽고 완만했다.

 

또 폭포

 

계곡은 울창한 수목에 싸여 어두컴컴하였다. 계곡은 흙과 풀과 나무가 품어내는 온갖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 찼고 물소리와 매미소리와 새 소리로 와글거렸다. 계곡은 서서히 고도를 낮추어가면서 곳곳에 자그마한 폭포와 소와 담을 그려내었다.

 

계곡 옆으로 이어지는 길

 

계곡은 그 어느 하나로 규정되거나 분석될 수 없는 총체성으로 원시의 비경을 펼쳐보였고 우리 4인은 엄마의 자궁 속을 헤엄치는 듯 정지한 시간으로 녹아들었다. 그것은 거대한 우주의 오르가슴이었다.

 

계곡 속에 숨은 적송 군자

 

달빛소리님

 

우리를 계곡으로 이끌어준 달빛소리님은 계곡으로 내려서자 곧바로 등산화를 아쿠아 슈즈로 갈아 신고 계곡물을 거침없이 건넜다. 곳곳에 펼쳐진 폭포와 바위 벼랑도 산 다람쥐처럼 날렵하게 오르내렸다. 그의 소탈하면서도 내공이 실린 미소에는 속세의 기름기가 쫙 빠진 탈속인의 허허로운 경지가 진하게 느껴졌다.

 

바위절벽을 내려오는 달빛소리님

 

칡대밭골 계곡과 월사동 계곡이 합쳐지는 합수점

 

칡대밭골은 고도가 낮아질수록 이골 저골 물이 합쳐지면서 그 몸피를 불려갔고 마침내는 본류인 월사동 계곡과 만나면서 그 운명을 다하였다. 월사동 계곡길도 여러 차례 계곡물을 가로지르며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월사동 계곡의 물은 더 이상 얕은 개울물이 아니었다. 아무리 얕은 곳을 골라도 그 수심이 무릎 위를 적셨다. 등산화를 벗어 샌달로 갈아 신고 두어 차례 계곡물을 건널 즈음에서야 저 뒤쪽에서 본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월사동 계곡

 

월사동 계곡

 

호호탕탕한 계곡물

 

산과 산 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월사동 계곡은 또 다른 비경을 펼쳐보였다. 구불거리며 휘돌아나가는 계곡은 혹은 그 거센 흐름으로 벼랑을 풍화시키고 혹은 그 느릿한 걸음걸이로 넓고 평평한 분지를 퇴적시켜놓았다.

 

월사동 계곡

 

월사동 계곡

 

묵밭에 지천으로 피어난 들꽃

 

정지된 시간이 햇살에 바래고

 

그 호호탕탕한 격류 속에서 폭포와 소와 담이 씩씩하였고 그 너머 묵은 밭에서 무수한 들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나비와 벌이 한가롭게 날고 먹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햇살아래 멈춰버린 시간이 바래고 있었다.

 

2010년 7월 17일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