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2시가 거의 다된 시각에 집을 나서 오후 2시 40분쯤 화진휴게소에 도착했다. 내남에 접어들면서부터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경주 시내로 들어가는 차들이 정체의 원인이었다. 경주 시내의 정체를 피하기 위해 경주 나들목을 통과하여 건천까지 갔다. 건천 나들목을 빠져나와 국도를 타고 바로 포항으로 갈 때까지는 좀 나아지는가 싶더니 포항 시내를 우회해서 바로 국도 7호선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타고 얼마쯤 달리자 대구-포항간 고속도로에서 쏟아져 나온 차들이 길을 가득 메웠고 정체는 끝없이 이어졌다. 정체는 화진휴게소에 도착할 무렵에야 서서히 풀렸다. 아직 한여름의 무더위가 계속되는데다 광복절이 끼인 3일 연휴가 많은 사람들을 바닷가로 유인을 한 것 같다. 경기(景氣)가 어렵다고는 해도 아직은 다들 먹고 살만한 모양이다.
화진휴게소에서 내려다본 바닷가 해수욕장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늦여름 피서를 즐기고 있었다. 그래도 해운대 백사장처럼 사람들이 붐비지 않아서 좋았다. 나는 이런 널널함이 좋다. 아무리 좋은 시설이 갖추어지고 더할 나위 없이 빼어난 절경이라도 그곳이 도떼기시장같이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라면 딱 질색이다. 의자는 비어 있어야 사람이 앉는 그 본래의 용도대로 사용될 수 있는 것처럼 편리한 시설과 눈부신 풍광도 내 몸에 절실한 실감으로 다가와야 의미가 있는 법이다. 그 수용 한계를 넘어선 시설과 풍경은 누군가 먼저 앉아버린 의자처럼 나에게는 아무런 쓸모없는 정물(靜物)에 불과할 뿐이다.
다시 바다를 끼고 이어지는 7호선 국도를 타고 북상했다. 오후 4시 30분쯤 망양휴게소 조금 못 미친 지점의 경치 좋은 바닷가에서 잠시 쉬었다. 기암괴석에 부딪쳐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가 시원하였다. 딸아이는 신을 벗고 짙푸른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그 잠시의 시원함을 위해 바닷물에 적신 발에 모래를 묻히지 않기 위해 다 큰 딸아이를 차까지 업고 가는 것은 물론 내 몫이었다.
이번 여행은 지난 여름휴가기간 동안 멀리 가지 않고 집에서 먹고 자며 당일치기로 울산 근교만을 맴돌았던 것에 대한 보상과 얼마 전 새로 산 차를 길들인다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강원도로 여정을 잡은 것은 연하고질당(煙霞痼疾黨: 안개와 노을에 미친 사람들의 무리)의 교주이신 한돌님이 올리신 화절령 여행기 때문이다. 산허리를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 운탄길[運炭路]과 그 길가에 지천으로 피어난 야생화가 보고 싶었고 그 원시의 대자연 속에 파묻혀 잠시나마 시끌벅적한 문명의 소음을 잊고 싶었다.
오후 6시가 조금 지나 해신당(海神堂)에 도착하니 조금씩 비가 흩뿌리기 시작하였다. 폐장시간을 넘기다보니 입장료를 내지 않고도 입장이 되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을 따라 다양한 형태의 남근상(男根像)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작은 어촌마을의 전설 하나를 소재로 이렇게 거대한 남근공원을 만들어 돈벌이에 나서는 그 발상이 놀라웠다.
애국가의 첫 소절이 울려 퍼질 때 배경화면으로 자주 등장하는 동해 바닷가 일출장면의 배경이라고 하는 추암해수욕장의 촛대바위에 도착하니 주위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바다위로 우뚝 솟아오른 바위들의 실루엣이 대단한 절경임을 짐작케 했으나 점점 짙어지는 어둠과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고속도로를 타고 강릉에 도착하니 저녁 9시였다. 모텔들이 밀집해 있는 버스터미널 근처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하룻밤을 묵을 모텔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방이 다 찼고 요금을 물어보니 최저가 12만원이었다. 강릉시내 전역이 다 같은 상황이라고 했다. 당초에는 강릉시내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아침 대관령을 넘어 정선으로 가려고 계획하고 있었으나 수정이 불가피했다. 바로 대관령을 넘어 진부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오대산과 월정사를 둘러보고 정선으로 내려가기로 급하게 여정을 변경했다. 짙은 어둠과 굻은 빗줄기를 뚫고 굽이굽이 돌아가는 대관령 옛길을 넘어 진부에 도착했으나 방이 없기는 진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의 운전으로 몸은 천근만근인데 집사람과 딸아이마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서든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가장(家長)된 자의 고단한 의무이다. 또다시 결단을 내려야했다. 빈방이 남아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다음 여행지인 정선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구불구불한 국도를 타고 진부에서 정선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길가의 네온사인 불빛을 찾았으나 허름한 민박집 간판만 눈에 뜨일 뿐 괜찮은 모텔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밤 12시 20분쯤 정선 시내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지점에서 그런대로 마음에 드는 모텔을 발견했다. 네온사인 불빛이 그렇게 반갑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웬걸. 외관은 그럴듯해 보여도 그 내부는 엉망이었다. 방에는 지저분해 보이는 이불만 덩그러니 놓여있고 수건이나 칫솔 따위 기본적인 세면도구조차 비치되어 있지 않았다. 아직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민박집도 그보다는 나을 듯싶었다. 그러나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잘 곳이 정해졌다는 것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형편없는 모텔시설과는 달리 주위의 경관은 빼어났다.. 모텔 옆을 흘러가는 계곡은 넓었고 그 수량도 풍부했다. 무엇보다 모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높이가 100미터 가까이 되어 보이는 폭포가 있었다. 정선 관광안내도에도 나오는 백석폭포였다.
오전 10시 30분쯤 아침을 먹기 위해 시내로 들어가 정선 장터로 갔다. 조그만 장터를 몇 바퀴 돌다가 그중 괜찮아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곤드레밥과 콧등치기를 시켰는데 둘 다 생각보다 맛이 있었다. 곤드레밥은 곤드레라는 나물을 쌀과 같이 끓여서 지은 밥에다 각종 양념을 해서 만든 일종의 비빔밥 같은 것이었고, 콧등치기는 일종의 메밀국수인데 먹을 때 면발이 콧등을 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어느 곳을 여행하던 그곳의 특산음식은 누구나 구미(口味)가 당기기 마련이다. 교통과 정보가 발달해서 전국의 음식이 거의가 평준화된 요즘 모처럼 맛보는 맛있는 향토음식이었다.
정선에서의 두 번째 여정은 ‘아라리촌’이라고 하는 민속촌이었다. 아라리촌은 시내에서 강 하나만 건너면 바로 닿을 수 있을 만큼 시내 근처에 위치해 있는데 너와집, 귀틀집, 저릅집 같은 강원도 특유의 가옥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었고, 그밖에도 각종 전통 농기구와 물레방아, 연자방아, 달구지 같은 전통기구들이 원형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통나무로 된 벽 사이사이마다 황토 흙을 채워 만든 귀틀집의 내부는 아늑한 느낌을 주었고 하룻밤 묵어가면 온몸에서 생기가 솟아날 것 같았다. 딸아이에게 전통 농기구의 쓰임새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 딸아이는 모든 것을 단순한 장난감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아비의 설명은 귓등으로만 흘려들어 좀 심하다 싶을 만큼 호되게 야단을 쳤다.
아리리촌을 나와 화암약수터에 들러 약수를 한모금 마시고 곧바로 화암동굴로 갔다. 주차장에 차를 대기가 어려울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동굴은 주차장에서 600미터 정도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올라간 지점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 그보다 300미터 가량 아래에 있는 출구로 나오도록 되어있었다. 동굴의 입구에서부터 2/3 정도는 일제시대부터 금광을 캐기 위해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뚫은 것이고 그 아래 출구 쪽의 1/3 정도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석회동굴의 형태로 되어있는 독특한 구조였다.
도대체 황금이 무엇이기에 이 깊은 산골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어 바위투성이의 산허리를 깎고 산의 깊은 속살까지 파고들었는지 새삼 자본과 권력의 거대한 힘 앞에 나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무기력함과 나 자신 역시 그 거대하고 질긴 그물 속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임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화암동굴을 떠나 백전리 물레방아로 가는 길에 잠시 몰운대(沒雲臺)에 들렀다. 몰운대는 오랜 세월동안 강물이 휘돌아나가면서 깎아놓은 까마득한 바위절벽이었다. 몰운대 위에서 내려다본 강촌마을은 비에 젖어 더욱 안온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백전리로 가는 길가의 산비탈에는 잘 자란 고랭지 채소들이 푸른빛을 내뿜으며 출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도 가도 논 한마지기 제대로 구경하기 어려운 깊은 산골에도 사람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나마 고랭지 채소 같은 소득 작물이 있기에 가능하지 싶었다.
나는 어디를 여행하든 산의 생김새와 들판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것은 결국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생산수단은 땅일 수밖에 없고 그 땅의 생김새에 따라 생산의 방식과 채산성(採算性)이 결정되고 다시 거기에 의존하여 인구의 밀집도와 촌락의 형태가 정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강원도는 확실히 산의 고장이다. 동해바닷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도(道) 전체가 온통 산, 산, 산이다. 그리고 그 산의 형태도 경상도나 전라도의 산과 같이 부드럽고 완만한 곡선 형태가 아니라 뾰족뾰족한 첨탑 같은 직선의 형태이다. 그리하여 길은 산과 산 사이를 비집고 흘러가는 강을 따라 이어지거나 굽이굽이 고갯마루를 넘어가는 꼬부랑길의 형태이고 사람들은 그 길을 포위하고 있는 산비탈에 붙박여 점점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또 그나마 대처(大處)라고 하는 곳도 물길과 물길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조그만 분지에 불과하다.
백전리 물레방아는 큰 개울에서 분기한 지류를 따라 한참을 더 골짜기로 파고든 지점에 앉아있었다. 깊은 산골짜기이기는 해도 며칠을 계속해서 내린 비 때문인지 수량은 풍부하였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수차(水車)를 보면서 물레방아가 옛날 연인들의 밀회장소의 상징이 된 것은 어쩌면 그 총유적(總有的) 소유방식보다는 물레의 회전운동을 상하의 왕복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방아와 남녀 간의 교합행위 사이에 존재하는 작동방식의 유사성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쉽게도 백전리 물레방아는 물레와 방아를 연결하는 목자재(木資材)가 부러져 방아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백전리를 빠져나와 고개를 하나 넘어가니 사북읍이었고 사북읍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탄광의 폐허 위로 우뚝하게 솟아있는 건물이 나타났다. 내국인의 출입이 허용된 유일한 카지노장이라고 하는 강원랜드였다. 강원랜드 주차장입구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이어진 산허리길을 따라 얼마쯤 올라가니 두 갈래의 비포장길이 나왔다. 그중에서 화절령이라고 표시된 왼쪽 길은 차단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곳을 지키는 관리인에게 물으니 차단막이 설치되지 않은 오른쪽 길을 따라가더라도 영월군 직동리에 닿을 수는 있는데 그 거리가 꽤 멀다고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단막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오른쪽 길을 택해 제법 험한 비포장길을 따라 작은 고갯마루까지 올라가니 길이 세 갈래로 갈렸다. 제대로 된 이정표도 없고 믿었던 내비게이션마저 작동을 멈춰버렸다. 도무지 어느 길로 따라가야 할 지 막막하였다. 게다가 시각은 오후 5시가 가까웠고 집사람과 딸아이도 노골적으로 불안감을 드러냈다. 아무리 이곳이 이번 여행의 주된 목적지라고는 해도 강행할 자신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다음번 연하고질에서의 트레킹에 기대를 걸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왔다.
강원랜드를 지나 다시 고개 하나를 넘어 얼마쯤 더 달려가니 정암사였다. 정암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어 국내 5대 적멸보궁에 속한다고 하나 절집이 모두 최근에 지어진 것이라 그런지 오래된 절에서 느껴지는 고색창연한 깊이 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경상도 지역에서 흔하게 만나는 상업적인 냄새가 짙게 풍기는 조그만 암자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이 지역에서는 꽤나 유명한 절이 이정도인 걸 보면 경상도 지역의 불교 교세가 얼마나 막강한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정암사를 지나 계곡을 따라 이어진 길을 계속 올라가니 고막이 찌릿해질 만큼 고도가 높아지더니 고갯마루 정상에 이르자 익숙한 풍경이 나타났다. 세월산방에서 백두대간 팀이 올려놓은 사진에서 자주 보았던 만항재였다. 온도계를 보니 영상 13도였다. 차에서 내려 만항재 광장으로 나가니 세찬 바람이 불었다. 계절을 착각할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었다. 여유를 가지고 광장 주위에 지천으로 피어난 야생화를 둘러보고 싶었으나 입술이 새파랗게 질러 오들오들 떠는 딸아이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 대신에 휴게소에 들러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만항재를 지나 영월로 넘어갔다. 구불구불한 만항재 고갯길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서산자락에 걸렸던 해가 넘어가고 곧이어 어둠이 짙게 깔렸다.
어두운 밤길을 따라 다시 한 시간 이상을 달려 영월 시내로 들어갔다가 외곽의 좋아 보이는 모텔로 들어가니 저녁 10시가 가까웠다. 이밤의 모텔은 지난밤의 그 모텔에 비하면 호텔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거기다 여기도 바로 옆에 꽤 넓은 계곡이 흐로고 있어 내년 여름휴가 때 다시와도 괜찮을 듯싶었다. 모텔 방에서 라면을 끓이고 반주로 소주를 곁들여 늦은 저녁을 먹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모텔을 나와 다시 영월 시내로 들어갔다. 조그만 시내를 한 바퀴 돌면서 먹을만한 식당을 찾다가 영월역 앞에서 괜찮아 보이는 식당을 찾아냈다. 식당의 주 메뉴인 다슬기 국을 시켜 아침을 먹었다. 예상했던 것만큼이나 괜찮은 맛이었다. 식당 바로 옆에 래프팅 사무실이 있어 식사를 마치고 바로 계약을 하고 동강 래프팅에 나섰다. 처음에는 래프팅이 뭐 그리 재밌을까 반신반의했는데 막상 고무보트를 타고 넓은 강물을 타고 내려오니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호연지기(浩然之氣)가 느껴졌다. 그리고 동강위에서 바라보는 주위의 경관도 한 폭의 동양화를 펼쳐놓은 듯 절경이었다. 래프팅을 마치고 나오니 오후 2시가 훨씬 넘어있었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울산으로 돌아오기로 하고 제천으로 향했다. 영월에서 제천으로 가는 국도를 타고 가다 표지판에 한반도지형을 닮은 곳이 있다 하여 잠시 외곽으로 빠졌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 했던가. 동강(東江)과 대비하여 서강(西江)이라 부르는 지천(支川)의 한 자락이 휘돌아나가는 물줄기 너머로 정말 한반도를 연상케 하는 땅의 형상이 웅크리고 있었다. 게다가 산줄기가 그곳에서 이를 때까지 중간 중간에 몇 개의 봉우리를 솟구쳐 올린 것으로 미루어봤을 때 그곳이 상당히 명당인 것 같아 혈처가 어디쯤일까를 가늠하고 있는데 집사람이 “내가 이런 영감 같은 사람하고 같이 살아야 하느냐”며 투덜거렸다.
오후 4시가 넘어 제천 나들목에서 중앙고속도로에 차를 올리고 신나게 달렸다. 새 차인데다가 배기량이 높아서 그런지 차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부드럽게 가속이 되었다. 시야가 트인 평지에서는 시속 170Km까지 속도를 높여도 차의 흔들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안동휴게소에서 저녁을 먹고 경주휴게소에 들리니 저녁 8시가 넘어있었다. 경주휴게소에서 잠시 쉬며 올려다본 동쪽하늘에는 보름달이 환하게 떠있었다.
2008년 8월 17일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 月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