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문>
갑은 백화점을 운영하고 있는 자인바, 백화점 건물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매장을 넓고 호화롭게 꾸미기 위해 기둥과 기둥사이의 간격을 넓게 축조하였다. 그런데 백화점을 개장하여 영업을 하는 과정에서 벽과 바닥에 금이 가고 건물이 흔들린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갑은 우선 당장에야 별 일이 있을까 싶어 보수공사를 미루고 방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화점 건물이 붕괴되어 쇼핑객이 500명가량 사망하였다.
위의 경우 갑의 죄책을 논하시오(단, 특별법은 논외로 하고 형법적 관점에서만 검토함).
1. 문제의 소재
설문의 경우 사망의 결과가 발생하였다는 점에서 갑은 고의 또는 과실의 존재 여부에 따라 살인죄 또는 업무상과실치사죄의 죄책을 지게 된다.
근대 형법, 따라서 우리 형법은 결과가 아니라 행위에 대해 책임을 추궁하고 있으므로 갑의 죄책을 논하기 위해서는 갑의 행위의 내적인 측면인 고의 또는 과실의 존재 여부에 대해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2. 고의와 과실의 개념
가. 개념
고의(故意)라 함은 주관적구성요건요소로서 “객관적 행위상황을 인식하고 구성요건을 실현하려는 의사”를 말하는 바, 지적 요소로서 객관적 구성요건요소(예컨대 행위의 주체, 객체, 수단, 결과, 행위와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인식(認識)이 있어야 하고, 의지적 요소로서 구성요건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의사(意思)가 있어야 한다.
한편, 과실(過失)이라 함은 역시 주관적구성요건요소로서 “사회생활상 요구되는 주의의무를 위반 또는 태만함으로써 구성요건적 결과발생을 예견하지 못하였거나 예견하였더라도 회피하지 못한 경우”를 말한다.
나. 구별의 실익
형법(刑法)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행위(예컨대, 살인, 절도, 상해 등)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미리 범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이를 위반하는 경우에 따르게 될 제재를 명확하게 규정해 놓은 행위에 대해서만 처벌을 하게 되는데(이른바, 죄형법정주의), 고의로 죄를 범한 경우에는 자신의 의사(意思)에 따라 금지된 행위를 명시적으로 범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처벌되나, 과실로 죄를 범한 경우에는 의사가 아니라 부주의(不注意)에 의해 법질서의 명령을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불법과 책임이 고의범보다 가볍다.
따라서 과실범의 경우 법률에 특별규정이 있는 경우에 한하여 예외적으로 처벌된다[예컨대, 고의로 타인의 재물을 손괴한 경우에는 손괴죄로 처벌되나, 과실로 타인의 재물을 손괴한 경우에는 처벌되지 않는다. 다만, 민사적으로는 고의와 과실을 구별하지 않으므로 과실로 타인의 재물을 손괴한 경우라도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책임을 진다(민사책임과 형사책임의 준별)].
3. 미필적 고의와 인식 있는 과실의 구별기준
가. 체계적 지위
위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그 제재의 범위와 정도에 있어 많은 차이가 있으므로 고의와 과실의 구별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때에 따라 법이 금지하고 있는 결과가 고의에 의해 야기된 것인지 과실에 의해 야기된 것인지 애매한 경우가 있다. 이러한 고의와 과실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문제가 미필적 고의와 인식 있는 과실의 구별기준의 문제이다.
나. 개념
미필적 고의(未必的 故意)라 함은 “행위자가 객관적 구성요건실현의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또한 그것을 감수 또는 용인하는 의사를 표명한 경우의 고의”로서, 고의의 지적ㆍ의지적 요소가 위축된 가장 약화된 형태의 고의이다.
한편, 인식(認識) 있는 과실(過失)이라 함은 “행위자가 구성요건의 실현가능성은 인식하였으나 주의의무위반으로 인하여 구성요건이 실현되지 않을 것으로 신뢰하고 결과발생을 회피하지 아니한 경우의 과실”을 말한다.
다. 구별기준
(1) 문제점
구성요건적 결과발생을 인식하였다는 점, 다시 말해 지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미필적 고의나 인식 있는 과실은 차이가 없다. 그러나 미필적 고의에는 의지적 요소가 존재하나, 인식 있는 과실에는 그것이 없으므로, 미필적 고의의 의지적 요소의 구체적인 내용을 둘러싸고 견해가 대립된다.
(2) 학설
(가) 용인설(容忍說)
행위자가 결과발생의 가능성을 인식하면서도 이를 용인(容忍)한 경우는 미필적 고의이고, 용인하지 않은 경우는 인식 있는 과실이 된다는 견해이다(통설). 여기서 용인이란 결과발생을 내심으로 승낙하여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정서적 태도, 또는 결과를 목표로 의욕한 것은 아니지만 행위의 부수결과로 동의하는 것을 말한다.
이 견해에 대해서는 고의의 의지적 요소는 결과에 대한 실현의사라는 심리적 현상이므로, 책임요소로 검토되어야 할 용인이라는 정서적ㆍ감정적 요소를 고의의 의지적 요소로 검토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비판이 있다.
(나) 가능성설(可能性說)
행위자가 결과발생의 구체적인 가능성을 인식하고도 행위하였을 경우에는 미필적 고의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인식 있는 과실이 된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대해서는 결과발생에 대한 의지적 요소를 요구하지 않으므로 인식 있는 과실의 존재를 부인하게 되어 고의의 범위를 지나치게 확대하게 된다는 비판이 있다.
(다) 개연성설(蓋然性說)
행위자가 결과발생의 개연성을 인식한 경우에는 미필적 고의이고, 단순한 가능성을 인식한 경우에는 인식 있는 과실이 된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대해서는 개연성(蓋然性)과 가능성(可能性)을 구별할 수 있는 명백한 기준이 없다는 비판이 있다.
(라) 감수설(甘受說)
행위자가 결과발생의 가능성을 인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위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구성요건실현의 위험을 감수한 때에는 미필적 고의가 되고, 결과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신뢰한 때에는 인식 있는 과실이 된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대해서는 고의와 과실을 구분할 수 있는 본질적인 평가기준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3) 판례
우리 대법원은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하려면 결과발생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있음은 물론 나아가 결과발생을 용인(容忍)하는 내심의 의사가 있음을 요한다.”고 하여(대법원 1987. 2. 10. 선고, 86도2338호 판결 참조), 용인설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4) 검토
결과발생의 가능성을 인식하면서도 행위에 의하여 이를 강화하였을 때에는 행위자의 이성적 대응으로 인하여 의사에 의한 침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미필적 고의는 지적 요소로서 결과 발생의 가능성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필요하고, 의지적 요소로서 그 위험을 감수한 경우에 인정된다는 점에서 감수설이 타당하다고 본다.
4. 사안의 해결
설문에서 갑은 백화점을 경영하는 자로서 백화점을 개장하여 영업을 하는 과정에서 벽과 바닥에 금이 가고 건물이 흔들린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렇다면 갑은 위와 같은 보고를 통해 건물이 붕괴될 수 있고 또 이로 인해 인명이 살상될 가능성을 인식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갑은 우선 당장에야 별 일이 있을까 싶어 보수공사를 미루고 방치하였을 뿐이라는 점에서 건물이 붕괴되고 이로 인해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거나 이러한 결과가 발생해도 상관없다는 의미의 의사적 요소를 인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미필적 고의에 관한 감수설이나, 통설ㆍ판례인 용인설을 따를 경우, 갑에게 살인에 대한 미필적 고의, 즉 살인죄의 죄책을 인정할 수는 없다(한편, 가능성설에 의하면, 갑은 결과발생의 가능성을 인식하였므로, 살인에 대한 미필적 고의를 인정할 수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갑은 벽과 바닥에 금이 가고 건물이 흔들린다는 보고를 받음으로써 건물이 붕괴되고 이로 인해 사람이 사망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식하였으므로, 즉각 쇼핑객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건물에 대한 보수공사를 진행하여야 할 법률상의 주의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게을리 하였다는 점에서 과실을 인정할 수 있다.
한편, 갑은 백화점 건물을 유지ㆍ관리하는 자로서 건물의 붕괴로 인하여 사람의 생명ㆍ신체에 대해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고 할 것이므로 갑의 과실은 업무상 과실로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갑은 업무상의 주의의무를 게을리 하여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으므로 업무상과실치사죄의 죄책을 지게 된다. 그리하여, 갑은 5년이하의 금고(禁錮)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罰金)에 처하게 된다.
만약 이 사안에서 갑에게 살인의 미필적 고의를 인정할 수 있다면, 갑은 사형(死刑), 무기(無期) 또는 5년 이상의 징역(懲役)에 처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같은 결과라 할지라도 그것이 고의에 의해 발생하였는가, 아니면 과실에 의해 발생하였는가에 따라 그 법적 제재가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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