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엄(香嚴: ? ~ 898)은 등주(鄧州)사람으로 속성은 유(劉)씨이며, 법명은 지한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백장회해 선사의 문하에서 수행하다가 후에 위산영우(?山靈祐)선사를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키는 7척이나 되고 아는 것이 많고 말재주가 능하며 학문은 당할 이가 없었다.
하루는 스승 위산이 향엄에게 물었다.
"그대가 터득한 지식은 전부 듣고 본 것뿐이다. 지식에 대해선 묻지 않겠다. 그대가 태어나기 전, 동과 서를 구별하지 못했을 때의 그대 모습을 말해 보라."
이에 향엄은 대답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한참 있다가 특유의 지식과 말재주를 동원하여 몇 마디 했으나 모두가 엉터리였다. 향엄은 마침내 스승에게 도를 일러주실 것을 청하니 위산이 말했다.
"내가 말하면 옳지 않다. 스스로가 일러야 그대의 안목이니라."
이때 향엄은 방으로 돌아와 모든 서적을 두루 뒤졌으나 한마디도 대답에 맞는 말이 없었다. 그 길로 그는 서적을 몽땅 태워버렸다. 책을 태우는 것을 보고 달려온 학인이 자기에게 책을 달라고 하자 향엄이 말했다.
"내가 평생 동안 이것 때문에 피해를 입었는데 그대가 또 피해자가 되려는가?"
향엄은 한 권도 주지 않고 몽땅 불태워 버리며 굳은 각오를 했다.
"금생엔 불법을 바로 배우지 못했다. 오늘날까지 나를 당할 자가 없으리라 여겼었는데, 오늘 위산선사께 한 방망이 맞으니 그런 생각이 깨끗이 사라졌다. 이제는 평범한 대중 스님으로 살며 여생을 보내리라."
향엄은 이런 각오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스승 위산께 하직하고 향엄산으로 들어가 옛날 혜충국사가 살던 터에 암자를 짓고 수행에 들어갔다.
하루는 마당에서 풀을 베면서 번뇌를 덜고 있는데 무심코 던진 기왓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는 순간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香嚴擊竹).
향엄이 대오(大悟)한 후에 개당(開堂)을 하니 스승인 위산(?山)스님이 편지와 주장자를 보내왔다. 이를 받고 향엄은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울었다. 옆에 있던 제자가 놀라서 물었다.
"스님께서는 왜 그렇게 우십니까?"
"겨울에 할 일을 봄이 되어서야 시키는구나."
한 스님이 향엄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소리이전의 한 구절입니까?"
향엄이 대답했다.
"그대가 묻지 않을 때에 대답하리라."
"지금 대답해주십시오."
"지금은 묻고 있느니라."
한번은 향엄이 제자들에게 물었다.
"지금 어떤 사람이 나무에 올라가서 손으로 가지를 잡지 못한 채 입으로 나뭇가지를 물고 발은 나무를 딛지 않고 있다. 나무 아래에서 한 사람이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하겠는가? 만일 대답하지 않아도 죽임을 당할 것이고 대답하면 떨어져 죽을 것이다. 자! 빨리 대답해 보라."
그때 호두(虎頭)라는 스님이 나서서 말했다.
"나무에 오른 뒤에는 묻지 않겠습니다. 오르지 않았을 때를 말씀해주십시오"
이에 향엄이 껄껄 웃었다.
후일 분양선소(汾陽善昭)스님이 이를 두고 읊었다.
"향엄이 가지를 문 일을 사람들에게 보이니
동포(同袍)들에게 참된 소식 전함이네
의심하면서 도리어 말꼬리를 따르니
숨 끊어져 죽은 이들 티끌처럼 많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