賞春曲
상춘곡
丁克仁
정극인
홍진(紅塵)에 뭇친 분네 이내 생애(生涯) 엇더한고.
녯 사람 풍류(風流)를 미칠가 못 미칠까.
천지간(天地間) 남자(男子) 몸이 날 만한 이 하건마는,
산림(山林)에 뭇쳐 이셔 지락(至樂)을 마랄 것가.
수간모옥(數間茅屋)을 벽계수(碧溪水) 앏픠 두고
송죽(松竹) 울울리(鬱鬱裏)예 풍월주인(風月主人)되여셔라.
엊그제 겨을 지나 새 봄이 도라오니
도화행화(桃花杏花)는 석양리(夕陽裏)예 퓌여 잇고,
녹양방초(綠楊芳草)는 세우중(細雨中)에 프르도다.
칼로 말아낸가, 붓으로 그려 낸가,
조화신공(造化神功)이 물물(物物)마다 헌사롭다.
수풀에 우는 새는 춘기(春氣)를 못내 계워 소리마다 교태(嬌態)로다.
물아일체(物我一體)어니, 흥(興)이에 다를소냐.
시비(柴扉)예 거러 보고, 정자(亭子)애 안자 보니,
소요음영(逍遙吟詠)하야, 산일(山日)이 적적(寂寂)한데,
한중진미(閑中眞味)를 알 니 업시 호재로다.
이바 니웃드라, 산수(山水) 구경 가쟈스라.
답청(踏靑)으란 오늘 하고, 욕기(浴沂)란 내일하새.
아침에 채산(採山)하고, 나조해 조수(釣水) 하새.
갓 괴여 닉은 술을 갈건(葛巾)으로 밧타 노코,
곳나모 가지 것거 수 노코 먹으리라.
화풍(和風)이 건듯 부러 녹수(綠水)를 건너오니,
청향(淸香)은 잔에 지고, 낙홍(落紅)은 옷새 진다.
준중(樽中)이 뷔엿거든 날다려 알외여라.
소동(小童) 아해다려 주가(酒家)에 술을 믈어,
얼운은 막대 집고, 아해는 술을 메고
미음완보(微吟緩步)하여 시냇가의 호자 안자,
명사(明沙) 조한 믈에 잔 시어 부어 들고, 청류(淸流)를 굽어 보니,
떠오나니 도화(桃花)ㅣ로다.
무릉(武陵)이 갓갑도다, 져 메이 긘 거인고.
송간(松間) 세로(細路)에 두견화를 부치 들고,
봉두(峰頭)에 급피 올나 구름 소긔 안자 보니,
천촌만락(千村萬落)이 곳곳이 버려 잇네.
연하일휘(煙霞日輝)는 금수(錦繡)를 재폇는 듯,
엊그제 검은 들이 봄빗도 유여할샤.
공명(功名)도 날 끠우고, 부귀(富貴)도 날 끠우니,
청풍명월(淸風明月) 외(外)예 엇던 벗이 잇사올고.
단표누항(簞瓢陋巷)에 흣튼 혜음 아니하네.
아모타, 백년행락(百年行樂)이 이만한들 엇지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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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극인[丁克仁 1401(태종 1)∼1481(성종 12)]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영성(靈城). 자는 가택(可宅), 호는 불우헌(不憂軒)·다헌(茶軒) 또는 다각(茶角). 광주(廣州) 출신. 진사 곤(坤)의 아들이다. 1429년(세종 11) 생원이 되고, 여러 번 과시에 응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437년 세종이 흥천사(興天寺)를 중건하기 위하여 대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태학생(太學生)을 이끌고, 그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왕의 진노를 사 북도(北道)로 귀양을 갔다. 그 뒤 풀려나 태인으로 내려와, 초사(草舍)를 짓고 불우헌이라 명명, 자호 또한 이를 사용하였다. 불우헌 앞 비수천(泌水川) 주변에 송죽을 심고 밭을 갈아 양성을 힘쓰면서 향리자제를 모아 가르치고, 향약계축(鄕約契軸)을 만들어 풍교(風敎)에 힘썼다. 1451년(문종 1) 일민천거(逸民薦擧)의 은전으로 광흥창부승(廣興倉副丞)이 되어 은일(隱逸) 6품(六品)을 받았다. 이어 인수부승(仁壽府丞)으로 있다가 1453년(단종 1) 한성판관 성순조(成順祖)의 강력한 권유로 전시(殿試)에 응시, 급제하여 김수령방(金壽寧榜) 정과(丁科) 13명에 들었다. 1455년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하자 전주부교수참진사(全州府敎授參賑事)로 있다가 그 직을 사임하고 태인으로 돌아갔다. 그 해 12월 조정에서는 인순부승록(仁順府丞錄)으로서 좌익원종공권(佐翼原從功券) 4등을 내렸다. 이로부터 다시 출사하여 약 10년간, 네 번의 성균관주부, 두 번의 종학박사(宗學博士)를 지내고, 사헌부감찰 및 통례문통찬(通禮門通贊) 등을 역임하였다. 1469년(예종 원년) 69세 때 태인현 훈도로 있다가 사간원헌납으로 다시 옮겨 조산대부 행사간원정언(朝散大夫行司諫院正言)으로 특승되었고, 또 척불론을 펼치다가 하옥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석방되었다. 1470년(성종 1) 치사(致仕:나이가 많아서 관직을 내어놓고 물러남), 귀향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1472년 영달을 구하지 않고 향리 자제를 교회(敎誨)한 공으로 3품산관(三品散官)의 은영(恩榮)이 내리자 이에 감격, <불우헌가 不憂軒歌〉·〈불우헌곡 不憂軒曲〉을 지어 이를 송축하였다. 비록 환로의 영달은 없었으나 선비로서의 지개(志槪)와 풍도(風度)를 고수하였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면서 81세로 별세하였다. 예조판서 겸 지춘추관성균관사에 추증되었다.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