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이가 고단하고 팍팍할 때는 본능적으로 산으로 든다. 도대체 산에는 무엇이 있기에 주말만 되면 기를 쓰고 산을 오르는 것일까. 결국은 다시 내려와야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주말만 되면 산으로 달려가는 것일까.
흙과 돌과 풀과 나무와 물과 바람과 냄새와 소리 따위의 총체가 산이라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도무지 주말마다 도지는 이 안개와 노을에 대한 고질병이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가 주말에 산에 간다는 것은 주중에는 산 아닌 곳에 산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산과 산 아닌 것, 그 사이 어디쯤엔가 우리 고질병의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그 경계가 희미해져 버리면 어떻게 될까. 하늘과 땅, 나와 너, 현실과 이상 사이를 가르는 금이 흐물흐물해지면 어떻게 될까. 음(陰)과 양(陽)의 모든 이분법적 경계가 사라지고 그 이전 태극(太極)의 혼돈(混沌) 속으로 들어갔을 때의 풍경(風景)은 어떠할까.
어제는 왜 프리드리히 니체가 일찍이 그리스 세계에 아폴론적 태양의 질서를 수립한 소크라테스를 저주하고 저 원시의 디오니소스적 달의 축제를 찬양했는지를 실감한 하루였다.
안개는 모든 경계를 지워버렸다. 안개는 그 몽롱한 입김을 풀어 하늘과 땅, 나무와 풀, 흙과 돌, 냄새와 소리, 사람과 산,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경계를 풀어헤쳐 한 덩어리로 뭉쳐놓았다. 그 속에서 우리는 먹고, 마시고, 걷고, 떠들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라는 생각조차 없었다.
나비가 꽃을 찾듯 주말이면 우리는 또 산을 찾으리라. 그러면서 우리의 질환은 더 깊어지겠지만 그러면 또 어떠랴. 죽을 때까지 낫고 싶지 않은 게 이 병(病)인 것을. 이름 하여 연하고질(煙霞痼疾)---
2014년 6월 23일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 月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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