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 회해
백장(白丈 : 720 ~ 814)은 복주(福州) 장락현(長樂懸)사람으로 성은 왕(王)씨, 법명은 회해(懷海)이다. 15세때에 출가하여, 경(經), 율(律), 논(論)을 익힌 다음 남강(南康)에서 크게 선풍을 드날리고 있던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문하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고 그의 법을 이었다.
백장은 마조와 강변을 산책하며 들오리에 대한 문답을 하다가 코를 비틀리고는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는 돌아와서, 자신의 방에 들어가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하도 시끄러워서 대중들이 백장의 방문 앞에 몰려들어서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백장은,
"큰 스님께 가서 물어봐라."
그러자 대중은 마조의 방으로 다시 몰려가서
"스님 백장스님이 저렇게 대성통곡을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도 모르겠다. 그놈에게 가서 다시 물어보아라."
대중은 다시 백장의 방으로 몰려갔다. 백장의 방 앞에 이르니, 방안에선 백장의 깔깔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중들은 까닭을 몰라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니, 백장은 웃음을 그치지 않으면서 대답했다.
"아까는 울었고 지금은 웃는다."
백장이 위산에게 말했다.
"화로에 불씨가 있나 보아라."
위산이 한참이나 재속을 뒤적거리더니
"불씨가 이미 다 꺼졌습니다."
백장이 위산이 가지고 있던 젓대를 받아들고는,
"어디 내가 한번 보자."
하고는 뒤적거리더니, 조그만 불씨를 하나 찾아내었다.
"자! 이건 불씨가 아니냐?"
이에 위산이 즉각 깨달았다.
백장이 위산과 더불어 일을 하다가 물었다.
"불(佛)이 있는가?"
위산이 대답했다.
"있습니다."
"어디에 있는가?"
위산이 나뭇가지를 하나를 들고 백장에게 바치니, 백장이 말했다.
"벌레가 나뭇잎을 먹고 있군."
백장이 남창부(南昌府)의 대웅산(大雄山) 즉, 백장산(白杖山)에 있을 때 어떤 스님이 찾아와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요즘 뭐 고마운 일이라도 있습니까?"
백장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나는 여전히 대웅봉(大雄峯) 위에 앉아 있다."
그러자 그 스님은 무엇을 고맙게 여겼는지 넙죽 절을 했다. 이때 백장 선사가 서슴없이 뺨을 후려갈겼다.
어느 날 위산, 오봉(五峯), 운암(雲巖) 셋이 백장을 모시고 산책을 하고 있었다.
백장이 위산에게 물었다.
"목과 입을 쓰지 않고 말할 수 있느냐?"
위산이 얼른 받았다.
'스님께서 먼저 말씀해 주시지요."
그러자 백장은
"내가 말하기는 쉬우나, 그랬다가는 법(法)이 쇠퇴해 버리고 말게다."
하고는 오봉을 돌아보며 똑같이 물었다.
"목과 입을 쓰지 않고 말할 수 있느냐?"
그러자 오봉이 말했다.
"스님께서 먼저 목과 입을 없애 보시지요."
이에 백장은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멀리 바라보며 나는 자네가 오기를 기다리겠네."
이번에는 운암에게 똑 같은 질문을 던지자 운암이 말했다.
"스님께선 이미 다 없애 버린 줄로 알았는데, 아직 목과 입이 남아 있습니까?"
백장이 이렇게 말했다.
"그 따위 소리를 하면 우리의 법이 끊어지고 만다.
백장이 법당에서 설법을 하는데, 설법을 할 적마다 한 노인이 언제부턴가 대중들 틈에 끼어서 설법을 듣다가 끝이 나면 돌아가고는 했다. 하루는 백장이 설법을 마치고 대중들이 돌아가자 그 노인은 돌아가지 않고 백장에게 다가와 말했다.
"전, 오백년 전의 이 절의 주지였는데, 어떤 중이 내게 묻기를, '깨달으면 인과에 빠집니까? 안빠집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빠지지 않는다.'라고 대답을 한 연후에 그 업을 받아서 여우의 몸을 받고 말았습니다. 스님께서 그 탈을 벗겨 주십시오."
그러자, 백장은 그 노인에게 말했다.
"그럼 내게 다시 물어보시오."
그러자 그 노인은 백장에게 물었다.
"깨달으면 인과에 떨어집니까?"
"인과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은 뛸 듯이 기뻐하며, “내 이미 여우의 몸을 벗었도다!"하고는 백장에게 절을 하며 부탁을 했다.
"뒷산에 여우 한마리가 죽어 있을 터이니 장사를 지내주십시오."
백장은 이튿날 대중들을 이끌고 뒷산에 올라가 동굴에서 여우의 시체를 찾아서 다비식을 해주었다[이것이 그 유명한 백장의 야호선(野狐禪: 여우의 선)이다].
백장이 위산에게 법을 전하고 그를 주지로 앉히려 하자, 그때까지 수제자로 있던 화림이 따졌다.
"제가 수제자인데 왜 위산을 주지로 앉히려 합니까?"
백장이 말했다.
"만일 네가 대중 앞에서 틀을 벗어난 말 한마디만 할 수 있다면 네게 주지를 주겠다."
백장은 곧 대중을 불러 모은 뒤 물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을 물병이라 불러서는 안 된다면 무엇이라 부르겠느냐?"
이에 화림이 말했다.
"말뚝이라 부를 수도 없지요."
백장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위산 쪽을 돌아보았다. 위산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더니 물병을 걷어 차버렸다. 그걸 보고 백장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첫째 자리가 촌놈에게 넘어가고 말았구먼."
---------------------------------------------
백장은 <백장청규(白杖淸規)를 제정한 것으로 유명하다. 선가의 온갖 직책에서부터 식사에 이르기까지 여러 규율이 백장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것도 역시 백장이다.
백장이 94세의 고령에도 제자들과 함께 일을 하여, 이를 보다 못한 제자들이 도구를 감춰버렸다. 백장이 도구를 찾다가 못 찾자, 삼일동안 일을 못했다. 그래서 역시 먹지도 아니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이 할 수 없이 도구를 돌려주자, 일을 하였고, 금식도 하지 않았다.
그 후, 서기 845년 불가(佛家)는 당(唐) 무종(武宗)의 억불정책(抑佛政策)에의 해서 큰 재액을 당하는데, 당시 황제인 당 무종은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서 억불정책을 폈다. 그리고는, 4만 8천 6백여 사찰을 없애고, 2십 6만 5백여 스님을 강제로 환속시키고, 1만 5천여명은 나라에서 노비로 썼다. 그 와중에서도 오직 선종만이 남을 수가 있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백장청규를 이행하던 선종이, 경전과 불상이나 세속에 기대지 않고 몸소 일을 하여서 자급자족하였으므로 그 재액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모두 백장의 혜안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그 덕분에 다른 종파는 크나큰 해를 입었으나 선종만이 왕성한 발전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