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봄이 오는 길[인곡-봉의저수지-가인계곡-억산-팔풍재-석골사 산행기]
「산 넘어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온다네 들 너머 고향 논밭에도 온다네
아지랑이 속삭이네 봄이 찾아온다고
어차피 찾아오실 고운 손님이기에
곱게 단장하고 웃으며 반기려네
하얀 새 옷 입고 분홍신 갈아 신고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온다네 들 너머 고향 논밭에도 온다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어떤 특정한 음악이나 냄새를 맡게 되면
조건반사적으로 그 음악이나 냄새와 관련된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
나의 경우, 박인희의 “봄이 오는 길”이라는 노래만 들으면,
몸에서 힘이 빠지나가면서 갑자기 몽롱하고 나른한 환상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아련한 영상 하나가 머리에 떠오른다.
물에 씻겨 수정같이 투명해진 얼음조각이
군데군데 물에 잠긴 줄기부분에 매달려 있기는 해도
길고 가느다랗게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 끝에서는
노르스름한 버들강아지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내밀고,
그 보송보송한 잔털에서부터 봄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봄이 산으로 들로 산불처럼 번져가고,
흐드러지게 피어난 산복숭아 꽃마저 연분홍치마가 바람에 휘날리듯
현란하게 또 슬프게 쓰러진 후가 되면, 비로소 겨우내 메말랐던 가지위로
연초록의 새싹이 돋고 연붉은 진달래도 무더기로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산은 그 때부터 요염한 화장을 시작한다.
산과 산 사이에 있는 산골짝 논들은
이때 이미 부지런한 농부들에 의해 물이 잡히고,
말갛게 가라앉은 논물위로 요염한 산의 그림자가 비친다.
가끔 그 논물 위로 부드럽고 둥근 파장을 그리며
고개를 내민 개구리 한 마리가 까르르 울음을 울면
여기저기서 화답하듯 다른 개구리들도 잇따라 울기 시작하고
산골짝은 순식간에 개구리소리로 와글거린다.
이따금 저 멀리 산에서는
뻐꾹뻐꾹하며 뻐꾸기가 화음을 넣기도 하고,
하얀 솜털구름 몇 조각이 떠가는 푸른 하늘에는
사냥감을 찾는 솔개 한 마리가 긴 원을 그리며 선회하기도 한다.
산그림자를 가득 담은 무논을
퍼즐조각같이 구획하고 있는 논두렁사이로
리어카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작은 길이 나있고,
그 길 위로 10살 남짓한 한 아이가 걸어가고 있다.
아이의 손에는 막걸리가 든 2ℓ짜리 양철주전자가 들려있다.
주전자 뚜껑은 뒤집혀 놓여 있고 그 위에 마른멸치 한줌과 고추장 한 숟갈이 담겨 있고
그 위에 다시 잔으로 쓰이는 스텐 종지 하나가 덮여 있다.
아이는 엄마가 논에 물을 잡고 있는
형에게 보내는 참 심부름을 하고 있다.
아이는 심심하다.
아이는 막 발라놓은 논두렁을 밟아 발자국을 내보기도 하고,
무논에 돌을 던져 둥근 파장을 만들어보기도 하지만,
매번 반복되는 일이라 별 흥미가 없다.
아이는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주전자에서 흘러나온
몇 방울의 막걸리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에 코를 벌름거린다.
용기를 내어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갖다 대고 몇 모금을 마셔본다.
처음에는 떱뜨럼하면서도 코끝을 톡 쏘는
냄새가 싫다가 달짝지근한 뒷맛이 점점 좋아진다.
주전자를 덮고 있는 종지를 열고
그 속에 든 마른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먹어본다.
고소하면서도 매콤한 것이 맛있다.
이번에는 맵고 목이 마르다.
그래서 다시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막걸리를 벌컥벌컥 마신다.
얼마가지 않아 다리에 힘이 풀리고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어질어질해진다.
누렇게 시든 잔디사이로 돋아난 쑥이
햇볕에 그을려 파란 향기를 피워 올리는 논둑에
기대앉아 하늘을 쳐다본다.
몇 조각 걸려 있던 솜털구름은
산 너머로 사라지고 솔개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개구리 소리도 멈추고 뻐꾸기도 조용하다.
그때 갑자기 멀리서 솔개에 채인 듯
꿩 한 마리가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다리가 풀려버린 아이의 눈앞에
아롱아롱한 아지랑이가 어지럽게 피어오른다.
최근의 이 몇 년을 제외하고
나의 겨울은 언제나 춥고 배고프고 힘든 나날이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가을은 겨울의 시련에 대한 예감으로
나를 떨고 움츠러들게 만들었고,
봄은 그 시련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안도감과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대와 설렘을 갖게 하였다.
그래서 노래방 같은데서
노래 잘 부르는 친구를 만나게 되면,
나는 꼭 그 친구에게 박인희의 “봄이 오는 길”을 불러달라고
부탁하고는, 이제는 잃어버린 실낙원(失樂園) 같은 어린 시절의
저 아련하고 몽롱한 추억(追憶)의 그림을 떠올리곤 하였다.
이번 산행은 처음부터 ‘봄이 오는 길’을
더듬어보기로 작정하고 시작한 산행이었다.
그래서 나는 산행을 하기도 전에 이미 산행기의 제목을
‘봄이 오는 길’로 정해 두었었다.
인곡마을
출발
2006년 3월 11일 토요일 오전 9시 20분경
밀양시 산내면 인곡마을 복지회관 앞에서 산행이 시작되었다.
마을이 끝나고 봉의저수지를 지나면서 산길이 시작되었다.
길은 평지를 걷는 듯 부드럽고 순탄하였다. 좁고 긴 계곡을 따라 길은 이어졌고,
아직도 떨어지지 않은 마른 단풍잎 옆에는 노란 생강나무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생강나무
휴식
봄은 그렇게 오고 있었다.
그러나 봄이 오는 속도는
고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길이 조금씩 조금씩
고도를 높여갈 때마다,
봄은 점점 더 어려지고 있었다.
노루귀
버들강아지
그리하여 가인계곡 초입에서는
작고 귀여운 분홍빛 노루귀 꽃잎에 머물던 봄이
계곡 중턱 기도원 근처에서는 얼음을 뚫고 피어난
버들강아지의 하얀 잔털끝에 수줍게 매달려 있었다.
기도원
개울
오솔길
세월님들의 거세고 힘찬 숨결에
나의 숨결을 맞추기에는 나의 호흡이 너무 가늘고 느렸다.
나는 일찌감치 뒤로 쳐졌다.
그리고 취한 듯 흐느적거리며
한없는 느림을 즐겼다.
그렇다고 혼자 느긋하게
퍼질러 앉아 쉰 적은 없다.
느릿느릿하게 걸으며,
겨우내 온몸에 덕지덕지 내려앉은
권태와 둔감의 때를 벗겨내었다.
산죽
거기다 군데군데 군락을 이룬
산죽(山竹) 사이로 이어진 산길은
깊은 산사(山寺) 일 없는 노승(老僧)의 입김 같은 부드러움으로
저잣거리의 홍진(紅塵)에 시달려 예민해진 내 신경을 어루만져주었다.
오름길
이정표
억산
마치, 비파사나 수행을 하는 듯
부드럽고 완만한 산길을 부드럽고 느린 호흡으로 걷다보니
12시경 어느 듯 억산(億山) 정상에 도착하였다.
억산 정상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은 중국에서 날라 온 황사로
온통 뿌옇게 흐려 있었다.
억산에서 팔풍재 내려가는 바위절벽
잠시 앉아 숨 돌릴 틈도 없이
선두조가 기다리고 있는 팔풍재를 향해
가파른 바위절벽을 타고 내려갔다.
점심식사
팔풍재에는 먼저 온 세월님들이
벌써 점심을 먹고 있었다. 나는 터보님, 풀꽃사랑님, 계수나무님,
오늘 처음 나오셨다는 석준님 등이 앉은 자리에 끼여 점심을 먹었다.
식사도중에 운문산까지 가는
선두팀을 따라가지 말고 여기서
바로 석골사로 하산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늘 같은 날은 다시 고바윗길을
치고 오르며 체력을 소진하기 보다는
살랑살랑한 봄바람을 맞으며 아스라한 봄꿈에 취하고 싶어
은근히 누군가 그런 제안을 해주기를 바랐는데,
한마디로 “불감청(不敢請)이나 고소원(固所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식사를 마친 후 모두들 운문산을 향해 떠나고
터보, 풀꽃사랑, 석준, 월지 등 4인은 학교가다 중간에서
땡땡이치는 아이들처럼 약간의 불안과 약간의 스릴을 안고
팔풍재에서 석골사로 내려오는 계곡길을 따라 하산하였다.
내림길
이 계곡도 가인계곡 못지않게 부드럽고 완만했다.
거기다 남향이라 부드럽고 따뜻한 햇볕이 내려 쪼이고
점심을 먹으며 곁들인 두 잔의 복분자 술이 적당히 다리의 근육을 풀어주어
걸음걸음이 꿈길을 걷는 듯 했다.
석골사
1시 45분 석골사를 지나
하산주 자리인 청림산장에 도착하였다.
처음 얼마간 선두조를 기다리며
마루에 앉았다가 터보님의 제안으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청림산장 주인 할머니는 처음 내가 갔을 때는
안주로 땅콩 한줌밖에 주지 않았으나 나중에 미인인 풀꽃사랑님이 가시자
오이, 당근, 고추를 아끼지 않고 내놓으셨다
(역시 미인계는 어디서나 통하나 보다).
여기에다 풀꽃사랑님이 길가에서 뜯어온 쑥까지 곁들여,
세월과 종교와 문학에 대해 논(論)하다 보니 술자리는 점점 더 열(熱)을 더해 갔고,
선두팀이 도착한 4시 30분까지는 14병의 술이 비워졌다.
그리하여 선두팀과의 하산주 자리에서 청주 몇 잔을 더 걸치고
딩딩당에 몸을 실었을 때는 도도한 취기에 정신이 혼미하였다.
그리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6시 30분경
딩딩당에서 내려 ‘맑은샘 사우나’ 앞에 섰을 때는
가슴 한구석에서 설레임인지 기대인지 모를 어떤 뭉클한 감정이
왈칵 밀려올라와 목이 메였다.
봄은 그렇게 나의 가슴속에 들어와 있었다.
2006. 3. 11.
달은 못이 꾸는 봄날의 꿈 月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