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에 해질 때 산은 더욱 곱더이다[내원사매표소-노전암-산하동계곡-천성2봉-영산대 산행기]
간밤에 봉계 불고기 축제를
보고 와서 늦게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보니
오전 11시가 넘었다.
주말로 미뤄 두었던
막힌 개수대 보수공사(?)를 하고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서니
오후 1시 10분,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양산으로 가는
좌석버스를 타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는
완전한 코발트빛이었다.
들판에 살포시 내려앉은 햇살은 보석처럼 반짝거렸고
길가에 피어난 코스모스 꽃잎에 머무는
바람은 솜이불처럼 포근하였다.
열려진 차창으로 들어온 투명한 공기는
코발트빛 하늘과 함께 눈물샘을 자극하여
코끝이
시큰거렸다.
양산에서 택시로 갈아타고
천성산 매표소에 도착하니 오후 2시 10분,
신발 끈을 조여 매고 왼쪽 계곡을
따라 걷기 시작하였다.
완만하게 이어진 계곡 길을 따라 올라가니
천성공룡능선을 사이에 두고 계곡은 다시 두 갈래로
갈라졌다.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를 두고 잠시 고민하다
오른쪽 성불암 계곡은 다음번에 오르기로 하고
왼쪽의 산하동
계곡을 택했다.
옆구리에 계곡을 끼고
이어지는 길은 부드럽고 완만했다.
멀리 키 큰 소나무 같이 생긴
이동전화 중계탑 아래로 몇 채의 인가가 보였다.
몇 그루의 감나무에는 잘 익은 감이
가지가 휘어지도록 매달려
있었다.
그 아래로 몇 채의 퇴락한 시골집이
사이좋게 모여 있고 그 뒤로 노전암이 얌전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절집은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았다.
대웅전만 두드러져 보이고 나머지는 있는 듯 없는 듯 하였다.
절집
앞마당에는 몇몇의 산객들이
주지로 보이는 비구니 스님과 진지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노전암 입구에서
계곡은 다시
둘로 나누어졌다.
이번에는 오른쪽 계곡을 택했다.
길은 여전히 부드럽고 완만했다.
계곡이 깊어질수록 나무의 키도
높아져
수십미터의 나무들이 하늘을 가렸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을 걷는 듯 계속 올라가니
평평한 분지가 나오고 거기서
다시 계곡이 갈라졌다.
이번에도 오른쪽 계곡을 타고 오르니
다시 오른쪽으로 집북재로 이어지는 계곡과
왼쪽으로
영산대학교로 넘어가는 계곡이 갈라졌다.
이렇게 길은 끝없이 선택을 강요하였다.
작년 초여름 처음으로
세월을 따라
나선 산행길이
천성공룡길을 타고 올라 천성 제2봉과
화엄벌을 거쳐 홍룡폭포로 하산하는 코스였다.
제대로 쉴 틈도
주지 않는
산행고수들의 준족(俊足)에 기가 질린 상태에서
집북재에서 천성산 제2봉으로 오르는 그 가파른
오르막길의 기억이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있어
오른쪽의 집북재 계곡을 버리고 왼쪽 계곡을 택했다.
그런데 이 놈의 계곡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저 앞에 흐릿하게 하늘이 보여 능선인가 싶으면
한 구비 굽이치면서 다시 계곡이 이어졌다.
세월에서 3장이나
출력해 간
지도는 이제 무용지물이 되었고,
휴대폰도 먹통이라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주위는
햇볕이 들지 않아 어두컴컴하고
사람의 자취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에라
모르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밥이나 먹고 가자“
길이 계곡에서 점점 멀어지고
경사도 조금씩 심해지는 지점에서
털썩 주저앉아 늦은 점심 혹은 이른 저녁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나니
발걸음은 무거워도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날이 저물어지면 또 어떠랴.
일부러 오지 산행을 떠나는 한돌님 같은 분도 있는데,
렌턴 있겠다. 물 있겠다.
배부르겠다. 두툼한 파카에
담배도 반갑 이상 남았겠다. 무엇이 걱정이랴“
“그래! 까짓거 법대로 해뿌라!!”
이렇게 마음을 고쳐먹고 나니
모든 것에 한결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얼마를 더 올라가니
손바닥만한 햇살이 능선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길은 완만한 산허리 길로 바뀌었다.
오른쪽으로 산허리 길을 따라 얼마쯤
걸어가니
집북재에서 올라오는 오르막 끝 지점과 만났다.
눈앞에 보이는 바위봉우리로 부리나케 올라가니
웬걸! 저 앞에
또 다른 바위봉우리가 길게 누워 있고
그 배꼽지점에 조그만 정상석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 수백마리의 까마귀 떼들이
넓은 동심원을 그리면서 선회하고 있었다.
산정(山頂)의 나뭇잎은
울긋불긋한 물이 들기도 전에
누렇게 시들었고
그나마 반 이상이 지고 있었다.
오후 5시 40분, 드디어 천성산 제2봉에 올랐다.
그러나 하늘을 까맣게 뒤덮으며 머리
바로 위를 선회하고
있는 까마귀 떼들이 갑작스런 공포로 다가왔다.
도망치듯 정상을 지나치고
아쉬운 마음에 다시 뒤를
돌아보니
그 극성스런 까마귀 떼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
주위를
조망하였다.
시야는 일망무제로 거칠 것 없이 펼쳐졌다.
저 멀리 영취산에서 남으로 뻗어 내린 가름한 능선 위로
붉은
태양이 주위를 벌겋게 물들이며 마지막 황금빛 광선을
토해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금정산, 장산, 달음산,
대운산, 무룡산, 토함산,
남암산, 문수산, 정족산, 고헌산, 가지산까지...,
모든 산들이 비스듬한 태양의 각광(脚光)을
받아
더욱 육감적인 질감을 드러내며 혹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혹은 아스라이 멀리 파노라마처럼 엎드려 있었다.
하늘은 가장자리로부터 약간의 붉은빛을 띠다가
가운데로 올수록 에메럴드에서부터 짙은 코발트까지
다양한 빛깔의
층위(層位)를 드러내고 있었다.
동쪽하늘에는 동그랗고 흰 낮달이 이미 손바닥 한 뼘 높이로 떠올라
서쪽하늘을 불게 물들이고
있는 해와의 임무교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목구멍에서 울컥 주먹만한 감동이 솟구쳐 올라 목이 메었다.
바람이 몰아쳐
왔다.
옷을 흠뻑 적신 땀이 마르기 시작하면서 한기가 몰려 왔다.
멍해진 의식을 수습하고 파카를 꺼내 입었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면서 서서히 저녁 어스름이 깔렸다.
주위의 모든 사물이 시시각각으로 그 빛깔을 잃기 시작하였다.
천성산 제2봉에서 은수고개 쪽으로
얼마를 진행하다가 임도를 만났다.
다시 어느 쪽으로 진행할까를 망설이다가
안전한 길을 택해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어둠의 농도가 진해지는 만큼
달빛의 농도도 더욱 진해졌다.
길가에 무더기로 피어난 억새가
불어오는 바람에 서걱거리며 달빛을 잘게 부수고
함초롬히 이슬을 머금은 쑥부쟁이가
산객의 마음을 기대와 설렘으로 울렁거리게 했다.
산 아래로 덕계와 서창에서 뿜어내는 현란한 불빛에는
뱀의 혓바닥
같은 도시의 욕망과 환락이 넘쳐나고 있었다.
길은 완만하면서 끝없이 북쪽으로 이어졌다.
소금을 뿌린 듯 하얀 메밀밭
사이로
허생원을 싣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당나귀의
목에 걸린 방울소리마냥 가끔씩 찌르릉 찌르릉하는
풀벌레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기도 하였다.
절인지 인가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를 더 걷지 않아 길은 갑자기 방향을
남(南)으로 휙 꺾더니
-나중에 지도를 통해 확인해보니 그곳이 주남고개였다- 급하게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얼마
후 산길은 우람하게 서있는
영산대학교 건물 뒤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더니
깨끗하게 포장된 아스팔트길에 자리를 내주었다.
환한 영산대학교 캠퍼스를 가로질러
무거운 다리를 끌며 터덜터덜 걸어내려 오니
울산행 시내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버스에 올라
백미러에 달린 시계를 보니
저녁 7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2005년 10월 17일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 月池
*산행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