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꽃 필 무렵[석골사-팔풍재-명태재-호거대-진동재-방음리 산행기]
간밤에 비가 내렸다.
대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대기는 구름과 안개가 뒤섞여 있었다.
시야가 흐렸다.
딩딩당은 단촐하였다.
세월 14인이 전부였다.
딩딩당이 석남터널을 넘기 직전이었다.
산 아래로
자욱하게 구름이 깔려 있었다.
그 위로 영남알프스의 몇몇 준봉들이
섬처럼 빼꼼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모처럼 보는
운해(雲海)였다.
딩딩당이 석남터널을 넘어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서서히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얼음골이 얼굴을 들어냈다.
얼음골은 온통 사과밭이었다. 예전에도 얼음골을 무수히 지났다.
그러나 예전에는 얼음골에 이렇게 사과밭이 많은 줄 미처 몰랐다.
사과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화려하진 않았다. 굵은 왕소금을 뿌려 놓은 듯 하얬다.
바로 그 하얀 사과꽃이
얼음골이 사과밭골이었음을 실감케 하였다.
9시 15분, 석골사 들머리에 도착하였다.
간단하게 몸을 풀었다, 그리고 오늘의
산행이 시작되었다.
산으로 들어섰다. 짙은 안개가 산 전체를 휘감기 시작했다.
신비한 마법의 숲으로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연초록의 신록마다 방울방울 이슬이 맺혔다.
습도가 높았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들었다.
대비골은 경사가
완만하였다. 그 동안 나는 산에 목말랐었다.
완만한 경사의 대비골이 내 가슴을 시원하게 적셨다.
완만했던 계곡길이 끝났다.
급한 고바위길이 나왔다.
20여분 정도 숨을 헐떡거렸다.
팔풍재가 나왔다. 10시 45분이었다.
잠시 숨을
돌렸다.
방향을 오른 쪽으로 틀었다.
범봉으로 가는 길이었다.
안개는 여전히 짙었다. 길은 더욱 가팔랐다.
쌕쌕, 목구멍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땀이 눈을 가렸다.
벌써 2리터짜리 물병을 반 이상 비웠다.
11시 10분,
갈림길이 나왔다.
더 이상 이런 고바위 길은 없을 것이다.
숨 돌릴 틈도 없었다. 방향을 왼쪽으로 틀었다.
급한
내리막길이었다.
11시 45분, 전망대가 나왔다. 몇 개의 바위 절벽이었다.
서서히 안개가 걷혔다. 범봉 북쪽은
못안골이었다.
바위 절벽이 못안골에 걸려 있었다. 장쾌한 병풍을 보는 듯하였다.
넘실넘실 구름이 피어올랐다. 산신령의 입김이 어린
것 같았다.
대장님은 아직 세월이 밟지 못한 미답구간 중의 하나라 하였다.
전망대의 조망이 좋았다.
모두들 배가
고팠다. 조금은 이른 점심을 먹었다.
12시 20분,
오후 산행이 시작되었다.
높고 낮은 봉우리가 이어졌다.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었다.
능선산행이 끝없이 이어졌다.
오후 1시 15분, 명태재에 도착하였다.
모두들
식수를 보충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명태재에는 식수가 없었다.
물통을 점검해 보았다.
물이 넉넉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슬슬 불안해 졌다.
물 때문에 몇 번 고생을 해 본 경험이 있었다.
물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다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오후 2시, 호거대(虎居臺)에 도착했다.
높다란 바위 전망대였다. 바위는 유난히 흰
빛깔이었다.
멀리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왼편으로 운문사와 주차장이 내려다 보였다.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였다.
슬비님은 어제 마신 술이 덜 깨었다.
오전 내내 힘들어 했다. 팔풍재에서 다시 내려가고 싶다고도 했다.
그런 슬비님과 물망초님이 호거대에서 바로 운문사쪽으로 하산하였다.
나머지는 예정된 길을 계속 따라갔다.
물은 거의
다 떨어졌다.
목이 말랐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몸은 점점 지쳐갔다.
모모님과 제일 끝에 뒤쳐졌다.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걸었다.
허풍님이 후미조 무전기를 맡았다.
허풍님은 공터만 나타나면 골프스윙 연습을 했다.
그 여유와 체력이
부럽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다.
오후 3시 20분,
진동고개에 도착하였다.
세월 모두가 거기 있었다.
아무래도 물 없이 더 이상 전진하는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월지가 거기서 오른쪽으로 난 갈림길로 해서 하산하겠다고 나섰다.
나머지 4명의 세월님들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 나섰다.
대장님도 순순히 허락해 주셨다.
나머지 길은 자신도 직접
가보지 않아서
확신할 수가 없다고 하셨다.
이렇게 해서, 월지, 모모, 솔향기, 드가, 박하 옵션(?) 등
5명은
오른쪽 샛길로 빠져, 방음리로 하산을 시작하였다.
방음리로의 하산은 처음에는 길이 제법 뚜렷했다.
그러나 작년 태풍 때
넘어진 나무들이 앞을 가로막는 바람에
나중에는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숲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계곡으로
빠져 내려와 걷기 시작했다.
때로는 가시덤불이 앞을 가로막기도 하여 상당히 애를 먹었다.
계곡을 만나 한참을 내려왔다.
조그만 연못이 나타났다.
그 아래로 시멘트 포장길이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길옆으로는 봄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서늘하고 눅눅한 습기가 흘렀다.
그리고 그 위로 온갖 이름 모를 꽃들의 향기가 실려와 코끝을 자극하였다.
연초록의
신록 속에 흰 빛의 이팝나무꽃, 찔레꽃, 노란 빛의 애기똥풀꽃, 양지꽃,
자주빛의 각시붓꽃, 제비꽃, 그 밖의 온갖 이름모를 꽃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 있었다. 그리고 이꽃 저꽃 위를 날며, 춤추며, 배회하며, 노니는 검은나비, 노랑나비, 흰나비들...,
봄은 그렇게 무르녹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가 띵해져 왔다.
가눌 수 없는 취기가 확 몰려왔다.
다리는 취한 듯
후들거렸다. 가슴은 알 수 없는 설레임으로 요동쳤다.
나의 가슴에는 이제야 처음으로 제대로 된 봄이 찾아왔다.
시인
김춘수가 그랬던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동안 봄은 내게 한
정물(靜物)에 지나지 않았다.
양지바른 제방을 따라 누렇게 말라버린 수풀사이로
배시시 두 팔을 비틀며 새싹이 파랗게 고개를
내밀 때도 그랬고,
어느 날 갑자기 일사불란하게 피었다가,
불어오는 바람에 온 몸을 던져 현란하게 추락하던 벚꽃이 질 때도
그랬다.
나는 거기서 생명의 질김과
인생의 무상함을 읽었을 뿐이다.
그것도 오로지 머리로만, 그리고 그저 한
추상(抽象)으로만...,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봄이 나의 가슴속으로 들어왔고,
봄은 내가 되고, 나는 봄이
되었다.
그렇게 한 번 오른 취기(醉氣)는 좀처럼 깨지 않았다.
오후 5시 10분 흩어졌던 세월 14인이
방음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조성된
새마을운동 기념비가 있는 작은 공원에서
다시 모였을 때도,
거기서
터보님이 특별히 조달한 동동주 3통과
물망초님이 준비한 태화루 2통을 모두 거덜 낼 때도,
오후 6시 10분 딩딩당이
울산을 향해 출발할 때도,
나는 줄곧 취해 있었다.
딩딩당이 서쪽으로 비스듬히 걸린 햇볕을 받으며 운문고개를 넘어갈
때쯤,
나는 그 몰려오는 취기를 가누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저녁 7시 10분, 두런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차는 어느 듯 태화동 공영주차장에 도착해 있었다.
아직은 색깔을 구분해 낼 수 있을 만큼의 어둠이 내려 앉아 있었다.
몽롱한 취기에 휘둘려 비틀비틀 옛날 삼호다리를 걸어서 건넜다.
멀리서 막걸리 냄새를 닮은 희미한 사과꽃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2005. 5. 2.
달은 못이 불러주는 이름 月池
*산행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