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및 여행기

인간은 유한해도, 산천은 의구하다[석골사-석골능선-범봉-억산-구만산-양촌마을 산행기]

월지 2005. 10. 25. 15:31

아침부터 빗줄기가 굵어졌다 가늘어졌다를 반복했다.
오늘 산행이 예정대로 진행될지 여부가 불투명하였다.

그러나 2004년 9월 12일 오전 8시 5분,

딩딩당이 세월 23명을 태우고 태화동 공영주차장을 출발하였다. 

버스가 언양에서 상북으로 접어들 무렵 쳐다본 산은
구름과 안개 속에 숨은 채 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길위로 벌초에 나선 차량행렬이 길게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었다. 

결국 우회로를 택한 버스는 석남터널을 넘고 얼음골을 지나

오전 9시 30분 우리를 석골사 입구에 내려 주었다.

산은 여전히 먹장구름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비도 비록 가늘어지고는 있었으나 멈출 기미는 없었다. 

판초우의를 덮어쓰고 얼마쯤 걷다가 

답답하고 거북스러워 우의를 벗어버리니

어느새 비는 그치고  먹장구름을 뚫고 간간이 황금빛 햇살이 비쳤다.

주위는 저녁 어스름을 방불케 할 만큼 어두컴컴한 가운데
손바닥만한 작은 공간에 내려앉은 햇살이 점점 윤기를 잃어가는 풀잎과

그 끝에 매달린 이슬방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얼마를 걸어 대비골에서 흘러 내려오는 도랑 하나를

건너자마자 바로 가파른 오르막 능선길이 시작되었다.

 

 

 


비짓땀을 흘리며 고바위길을 오른 끝에
10시 20분경 주위가 확 트여 조망이 좋은 바위에 도착하였다.

왼편 대비골쪽으로 수리봉과 문바위 일부,

억산 깨진바위가 한눈에 들어왔다. 

 

잠시 쉬면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일어나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갑자기 발걸음이 무거워져 왔다.

 

공룡능선의 암릉길처럼 급한 경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만하지도 않은 은근한 그 경사길은
사람을 상당히 지치게 했다.

낙오를 우려한 백암거사님은
뒤에서 채근을 하고 발걸음은 무겁고
한마디로 죽을 맛이었다.

오전 10시 55분 치마바위에 도착하였다.
이름 그대로 까마득한 절벽으로 이루어진 그 바위는

정말 한폭의 거대한 주름치마를 연상시켰다.

여기서 다시 범봉(凡峰)에 이르기까지의 40여분은

산행초보를 완전히 기진맥진(氣盡脈盡)하게 하였다.

 

눈앞에 보이는 저 봉우리가 정상이겠거니 하고

죽을 힘을 다해 오르고 나면 또 다른 봉우리가 나타나고,

또 그렇게 오르고 나면 또 다른 꼭대기...,

그렇게 서너 차례를 반복해서
올라간 범봉(해발 862m)이란...,

그저 펑퍼짐한 분지에 헬기장이 딸랑 하나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주위에는 수목이 울창하여 조망도 안되고, 여기가 정상이라고

인식할 만한 뚜렷한 표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름은 헛것을 전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 경우에 딱 들어맞는 말 같다.

범(호랑이)이가 자주 출몰한다고 하여
- 근처에 호거대(虎居臺)라는 지명이 있다-
범을 음차(音借)하여 이름 붙여졌을 범봉(凡峰)! 

그러나 이 얼마나 기막힌 작명인가....,
범봉에서 그 범이 평범할 범(凡)자가 아닌가?
그저 평범한 봉우리, 아무런 두드러짐도 없이 그저 밋밋한 산봉우리!

생각해 보면

우리를 정말 지치고 힘들게 하는 것은

그냥 평범한 일상이 아닌가.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 붓고,
울고, 웃고, 떠들며, 괴로워하는 것이
사실은 저 평범한 일상이 아니던가......,

미안하다! 범봉아, 네게 무슨 잘못이 있으리,
범상(凡常)하다는 것의 고단함을 내 이제야 제대로 깨닫게 되었노니---

 

범봉에서 팔풍재로 가는 길은 완만한 내리막길이었다. 
선두와의 거리차를 벌충하기 위해 정신없이 내달렸다.
그리하여 불과 20여분만인 12시 5분경 팔풍재에 도착하였다. 

이미 충분한 휴식을 취한 탓인지 내가 도착하자말자

선두조는 슬금슬금 일어서더니 모두 달아나고 말았다.  

거기서 비상식량인 초코바를 한입 베어먹고
억산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고바위 길을 올랐다.

비상식량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상당히 심한 경사길이었는데도 별로 힘이 들지 않았다. 

다시 40분 가량을 심한 경사길에 달라붙어

한바가지의 땀을 흘리며 또 하나의 봉우리에 올랐다.

12시 40분이었다.

봉우리에 올라서자마자

선두조의 일원인 태풍님과 터보님의 얼굴이 보였다.

 

지난번 산행때의 기억으로는

거기서 20분 정도 완만한 능선길을 더 걸어가야

정상에 오르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바로 억산 정상에 도착하다니...,

지난 번과는 다른 코스로 올라왔다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린 결과였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흔히 ‘재수’라고 말한다. 

내 직업적 전문용어를 빌어 표현하자면,
주관적 인식과 객관적 사실의 불일치를 착오(錯誤)라 하는데,
그 착오 중에서 주관적 인식보다 객관적 사실이 유리한 경우를
‘재수 좋다’고 하고, 그 반대의 경우를 ‘재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정도가 심한 경우,
우리는 가끔 ‘더럽게’라는 형용사를 앞에 붙이기도 한다.

억산 정상에서 태풍님과 세일러문님은
배낭 몇 개를 방풍막처럼 둘러쳐 놓고 버너로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늦게 일어나 점심을 챙길 시간이 없어 라면을 챙겨 오셨단다.
덕분에 시원한 국물과 면발 몇 가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거기다 터보님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찌리리’ 한병을 내놓으셨고,

오늘 처음 뵙는 산맨님도 ‘찬물차’ 한병을 내놓셨다.

- 감정을 해본 결과 터보님의 찌리리와
산맨님의 찬물차는그 맛과 성분이 동일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라면국물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곁들여진

산정의 오찬(午餐)은 왕후장상의 그것이 부럽지 않았다. 

점심식사후, 간단하게 증거를 남기고  
오후 1시 15분경 오후 산행이 시작되었다. 


지난번 산행때 가인계곡으로 내려갔던 그 길을 따라내려 오다가

중간에서 가인계곡으로 빠지지 않고 계속 능선길을 타고 내려오는 하산길은
크고 작은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비단길의 연속이었다.

오후 2시 10분경, 등산로 바로 옆에서 작은 바위 하나를 만났다.  
부산 금정산에 있는 금샘바위같이 생긴 바위였는데, 조망이 좋아 잠시 쉬었다. 

 

왼편 가인계곡쪽으로 사자봉이 장대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봉우리 모양이 모두들 사자를 닮았다고 하는데,
내 눈에는 아무리 보아도 왕눈이 개구리의 모습이었다.

쉬는 동안 일행은 모두 떠나고

이제 나홀로 하산길이 시작되었다.

 

 

 


홀로 완만한 내리막길을 따라 얼마쯤 더 내려오니,
잘 정비된 임도가 나왔다. 임도를 가로지르니 다시 완만한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그리고 오후 2시 50분쯤 전망이 좋은 바위 봉우리에 도착하였다.

 

 



암봉(巖峰)은 장소가 협소하여
내가 도착하자 먼저 와서 쉬고 있던 일행들이 자리를 빼주었다. 

다시 혼자가 되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청도쪽과 밀양쪽 경관을 번갈아 조망하였다.

 

 

 

 

 

왼편 가인계곡쪽에 버티고 선 사자봉과 북암산의 바위절벽,
그 사이에 가로놓인 깊은 계곡들과 임마누엘 기도원, 그리고 저 멀리

부드럽게 허리를 꺾으며 유장하게 흘러가는 동천(東川)의 물줄기..........,

누가 감히 산에 의미를 부여하려 드는가!

인간(人間)은 유한(有限)해도, 산천(山川)은 의구(依久)한 것을,
산은 내가 오기 전에도, 또 내가 간 후에도 언제나 거기 그렇게 있는 서있는 것을,
산은 그저 산이요, 물 또한 그저 물일 뿐이거늘....., 

한번 빠져든 상념은 온 산과 계곡을 헤메다

두 번째로 당긴 담뱃불이 세찬 바람에 꺼져버려
더 이상 연기가 빨리지 않음을 의식하면서 가까스로 깨어났다. 

선두와의 상당한 거리차를 의식하게 된 발걸음은
그저 그렇다는 마음뿐, 다리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얼마쯤을 터덜터덜 걸어가니 

후미조 무전기를 맡으신 내게로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게로님과 동행이 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도저히 오를 수 없을 것 같았던 마지막 봉우리를 의외로 쉽게 올랐다.

거기에는 대장님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서 200m만 더 가면 구만산이란다.

일단 좀 쉬고 보자며 털썩 주저앉자말자,
먼저 구만산으로 갔던 선두조가 되돌아 왔다.

애써 여기까지 왔는데 지척에 있는 구만산을
밟지 않고 하산한다는 것이 상당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산은 다 같은 산이요, 몇 미터의 흙이 더 쌓여 있을 뿐인
그 지점을 꼭 밟아야만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다음에 인연이 있으면
다시 보기로 하고 아쉬운 하산길을 재촉하였다.

 

 

 

 


이후의 하산길은 왼쪽으로는 가인계곡을, 오른쪽으로는 구만계곡을
마치 나인[內人]처럼 거느리며 길고 부드럽고 완만하게 뻗어 내려왔다.
그길은 능선산행(稜線山行)의 묘미를 아낌없이 보여 주었다.

오후 5시 20분 드디어 유난히 길고도 힘들었던 산행이 끝났다. 
산길이 끝나는 지점에 작고 아담한 마을이 앉아 있었다.

그 이름도 정겨운 양촌마을이었다.

비스듬하게 석양이 빗긴 양촌마을에는 

벌써 가을이 찾아와 기웃거리며 편히 쉴 곳을 물색하고 있었다.

논에는 벼들이 누렇게 익어가고,
밭에는 고추들이 빨갛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양촌마을 입구에는 한천송덕비공원(寒天頌德碑公園)이 잘 단장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마련된 하산주 자리는 10월 초로 예정된 설악산 산행이야기로
준비한 하산주가 언제 동이 났는지도 모를 만큼 후끈하였다. 

'걸어다니는 산행백과사전'이라고 일컬어지는 파랑새님은

설악산 산행의 맵고 쓴맛을 얼마나 실감나게 설(說)하시는지
산행왕초보인 나를 완전히 주눅들게 했다.

거기다, 옆에 계신 세월의 대문호 터보님과
세월 공인 사진작가 대운산장님은 설악산 산행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수요야행으로 미리 체력을 다져야 한다면서 줄기차게 야간산행에의 동참을 펌프질하셨다. 

아쉬운 하산주 자리가 끝나고,

오후 6시 10분 딩딩당 버스는 다시
울산을 향해 출발하였다. 

시커먼 먹구름을 머리에 이고 당당히 버티고 선 운문산과
그 서북쪽으로 길고 부드럽게 이어진 산의 실루엣을 보면서,

만만치 않았던 오늘의 산행과 그것을 잘도 버텨준 내 두다리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오후 6시 40분 버스는 석남터널을 통과하였고,
새하얀 운무(雲霧)가 산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요강 크다 자랑 말고, 자주 비워 편히 가자”는
선바위님의 제창에 따라, 운무 가득한 휴게소에서
세월님들이 시원하게 요강을 비웠다.

그리고 딩딩당 버스가 태화동 공영주차장에서
오늘의 산에 만취하여 비틀거리는 23인의 세월님들을 부려놓은 것은
오후 7시 40분이었다.

 

 

 

2004년 9월 13일

달이라는 이름의 연못 月池

 

 

*산행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