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수골(淸水谷) 맑은 물에 세월(歲月)을 잊고[금수암-한피기고개-채이등-함박등-청수좌골-백련 산행기]
지난 번 늦어서 헐레벌떡 했던 기억을
거울삼아 오늘은 비교적 여유있게 일어났다.
아침을 챙겨 먹고 이제는 인도교로만 사용되는 옛날 삼호다리를 걸어서
오전 8시 정각 집합장소인 울산 중구 태화동 둔치 공영주차장에 도착했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일행 22명을 태운
차는
오늘의 목적지인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로 향했다.
하늘은 더 없이 푸르렀고,
시계(視界) 또한 거침없이
멀었다.
원래 입장료를 물어야 하지만
절집 단골손님임이 분명한 마하님이
매표원에게 웃으며 손짓을 하자 통도사 입구는 무사통과였다.
오전 9시 오늘의 산행 출발점인
금수암 입구에 도착하였다.
금수암 입구에 적혀 있는 "잡인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백암거사님을 흥분시켰다.
"잡인"이라니..., 나도 흥분했다.
분명히 세존은 불이(不二)의 정신을 설(說)하셨는데,
성속(聖俗)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듯한 저들의 머릿속이라니...,
금수암에서 한피기고개까지는
큰 고바위 없는 완만한 길이 이어졌다.
무용님, 장미님, 모모님 등과
의기투합하여 후미조에 가담하였다.
꼴찌의 넉넉함과 뒤쳐진 자의 여유로움...,
"이 무슨 괘변인가?" 하고 의아해 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지만 나는 꼴찌 산행을 좋아한다.
바쁘고 복잡하고 긴장된
사회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산에 왔는데
산에서마저 시간과 속도의 전쟁에 휘말릴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엉금엉금 기는 듯한 내 거북이
걸음이 안타까워
갔던 길을 되돌아 와서 짐까지 덜어주는 세월님들의 배려도 좋지만,
계절의 변화를 읽을 수 있고,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어 두었던 스스로와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지금 여기가 아니고서는 달리 어디에 있단 말인가...,
출발한 지 2시간 만에 제일 꼴찌로 한피기고개에 올라섰다.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펼쳐진 통도(通度)의 풍광(風光)은 넉넉함 그 자체였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자락속에
포근히 자리잡은 크고 작은 절집들이 단아하고 귀여웠다.
앞으로 개발의 광풍이 이 자리만은 비켜가기를 바랄뿐이다.
키 낮은 수목의 터널을 1시간 정도 걸었다.
채이등과 함박등을 통과하였다. 드디어 점심식사 시간.
식사 장소가 협소하여 우리 후미조(後尾組)는 그대로 식사조(食事組)로
재편되었다.
장미님, 모모님, 무용님...,
모두가 출중한 입담으로 식사의 즐거움을 더해
주셨다.
오늘의 여유로운 일정을 감안하여
대장님은 15분의 식사후 휴식시간을 선언하였다.
덕분에 여유로운
흡연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점심식사 후 막간을 이용하여
무용님의 풍부한 복부(腹部)를 정밀촬영(精密撮影)하고
오후 1시
청수좌골(淸水左谷)로 하산하는 오후 산행이 시작되었다.
처음 얼마간 산죽(山竹)의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자 시원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비스듬한 암벽위를 바람에 날리는 비단 치마자락처럼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그동안 쌓였던 피로를 말끔히 씻어 주었다.
얼마후 등산로를 따라서 하산하는 패와
계곡을
따라 하산하는 조로 갈리게 되었는데
물을 좋아하는 나는 아무런 주저없이 계곡쪽에 붙었다.
굵직굵직한 바위들과
너무 맑아 고기가 놀지 않을 만큼 깨끗한 계곡물...,
더욱 좋은 것은
물과 세월이 빚어 놓은
기기묘묘(奇奇妙妙)한 바위들의 앙상블이었다.
크고 작은 천연욕조(天然浴槽)를 연상하게 하였다.
분명 "선녀와 나뭇꾼" 이상의 전설이 깃들어 있을 법한
그 눈부신 비경(秘境)은 내 상상의 날개를 간지럽혔다.
그리하여 나는 등산로를 따라갔던 부류와
계곡을 타고 내려온 무리가 다시 모여 잠시 휴식을 취할 때
어둠이 스멀스멀 번져나오는 커다란 바위틈에서
우리 산악신앙(山嶽信仰)의 한 원형(原型)을 보았다.
빼어난
계곡의 바위밑이면 어김없이 목격되는 촛농과 시커먼 그을음,
그리고 재물로 쓰인 사과나 배 따위 과일이나 오징어나 황태 같은
어포들...,
어찌 교회나 절집에만
신(神)이 깃든다고 말할 수 있으랴!
인적이 닿지 않은 그 웅장한
신비에서,
계절마다 화장을 고치는 그 부지런함에서,
그러면서도 언제 어느 누구라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그
푸근함에서,
다른 어느 것에서도 뒤지지 않는
이 산과 이 계곡에 어찌 신이 깃들지 않는다고
감히
우길 수가 있으랴...,
그렇기에 수천년의 세월을 넘어
과학의 발달로 "무당들의 미신"쯤으로 치부하는 오늘날까지도
산신제(山神祭)라는 형태로 남아 우리의 고유종교로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리라...,
내려오기가 싫었다.
가능하다면
영원히 그 비경(秘境)속에
잊혀진 듯 방치된 듯 살고 싶었다.
그러나, 내게는 아직
내 어깨와 등을 필요로 하는
아내와 어린 자식이 있었다.
이후의 하산길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하산길의 마지막은
짜증과 냉소로 끝나고 말았다.
영악한 자본의 끝없는 이윤추구는
어느 한 곳이라도 청정지역을 온전히 남겨 두지 않았다.
온통 밀고 깍아서 천박한 덮게와 값싼 가리개로 쳐발라
행락객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무슨 무슨 가든과 산장들은
벌써 이곳을 완전히 점령하고 있었다.
그 맑던 계곡물은 이 점령군들의 군화발 밑에서,
채 흘러 보지도 못하고 이곳에서
벌써 죽어가고 있었다.
하산주로 마신 시원한 막걸리 몇잔에 취한 나는
귀가길 차안에서 "아저씨 노래 좀 크게요!"를 외치고
있었다.
막걸리와 김치가 적당히 섞인
가끔씩의 트림냄새 속에서 나는
벌써 냄새나는 잡인(雜人)이 되어 있었다...,
2004년 6월 14일
세월(歲月)이 머무는 연못 - 월지(月池)
*산행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