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근대성(近代性)과 타자(他者)에 관하여[‘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읽고]

월지 2014. 8. 27. 19:01

 

 

우리의 지난 세기를 강박(强迫)처럼 휘몰아온 가치 중의 하나는 근대화(近代化)와 서구화(西歐化)가 아닐까 싶다. “새벽종이 올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어렸을 적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저 새마을의 노래. 세월의 햇살에 바래어 희미해진 흑백사진 같은 저 아스라한 유년의 뜨락에 대한 기억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1970년대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한 어린 시절 뒷동산에서 내려다 본 내 고향집 풍경은 대략 다음과 같다.

 

몇 갈래로 갈라져 부드럽게 마을을 감싼 산줄기들. 그 산줄기 사이사이로 제 멋대로 퍼질러 앉은 20여 채의 초가집들. 아침저녁으로 그 집들마다 비슷비슷한 빛깔과 냄새를 풍기며 피어오르는 연기들. 각각의 골짜기마다에서 뱀처럼 흘러내려온 물줄기가 실개천을 이루며 한데 합쳐져 마을 앞에 길게 드러누운 못으로 흘러들고, 그 못 너머로는 모세혈관처럼 복잡하게 구획된 논들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집들마다에는 둥그스름한 흙담이나 섶으로 엮은 울타리가 그 경계를 가르고 집과 집을 잇고 집과 논을 연결하는 길들은 리어카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 좁고 출렁이고 구불텅하였다. 거기에는 직선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평면이라고 해봐야 논바닥이 전부였다.

 

그곳에서는 출퇴근 개념이 따로 없었다. 어른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논이나 밭에 나가 한두 시간 일을 하다 아침을 먹었고, 햇살 따가운 오후에는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서 낮잠을 즐겼다.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저녁을 먹고 다들 일찍 잠이 들었다. 저녁 9시를 넘겨 불이 켜져 있는 집은 드물었다. 일요일이라고 따로 쉬는 법도 없었다. 어쩌나 장날에 장보러 나가는 것이 유일하게 쉬는 날이고 나들이였다. 농번기에는 죽어라 일하다가도 농한기가 되면 낮에는 산에 가서 땔나무해오고 저녁에는 사랑방에 모여서 새끼 꼬는 것으로 소일했다. 그곳의 시간은 느슨하였고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으로 철저하게 구획되어 있지 않았다.

 

그랬던 마을이 저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지붕의 볏짚이 벗겨지고 기와나 슬레이트가 그 자리를 대신했고, 돌담과 울섶이 헐리고 브로크 담이 둘러쳐졌다. 경지정리사업으로 논과 길은 바둑판같이 반듯반듯한 직선으로 구획되어 그 모양새만으로는 내 논과 네 논의 구별이 어려워지고 넓고 평평하고 직선으로 뻗은 신작로 위로 네모난 빨간색 시외버스가 달렸다. 그 신작로 길을 따라 전신주가 줄지어 서고 집집마다 텔레비전 안테나가 섰다.

 

전깃불로 인해 밤은 짧아지고 빨간색 버스와 텔레비전이 그 아름다운 고립을 허물었다. 사람들의 생활리듬은 그 버스의 정차시각에 맞추어졌고 나라 전체의 소문과 유행에 민감해졌다. 나이든 사람들의 경험에 바탕한 권위는 떨어지고 새로운 소식에 민첩한 젊은 사람들의 발언권이 높아졌다. 동네의 그 많던 처녀, 총각들은 줄줄이 학업과 일자리를 찾아 떠나고, 사람들로 복닥거리던 마을은 마침내 오갈 데 없는 늙은이들만 남게 되었다.

 

지금 새삼 돌아보면, 저 새마을 노래가 몰고 온 내 어린 시절 고향마을의 급속한 변화를 추상화시켜 표현한다면 근대화나 서구화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지난날 우리를 그렇게 주눅 들게 하고 반드시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고의 가치로 등장한 근대화란 무엇인가. 근대화의 전제가 되는 근대성(modernity)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분석과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이성(理性), 합리성(合理性), 계몽(啓蒙), 화폐(貨幣) 등의 가치에 터잡아 시공간(時空間)을 균질화(均質化)하고 계량화(計量化)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특징을 가진다. 그리하여 눈으로 보이지 않은 시간을 분, 초 단위까지 분할하여 시계(時計)라는 시각적 장치를 통해 계량화하고 공간을 직선과 평면과 원 따위 기하학적 도형으로 구획하고 통제한다.

 

한편, 세계문학사에서 근대화 또는 서구화를 가장 잘 형상화한 작품으로는 단연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이 첫 손에 꼽힐 것이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한 우화(寓話), 진취적인 용기와 독립심, 개척정신과 청교도주의 등 영국적 가치관의 승리를 그려낸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하는 이 소설에서 태평양의 어느 무인도에 표류한 영국인 로빈슨 크루소는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원시의 그 섬에서 물시계와 달력을 만들어 시간을 통제하고, 난파선에서 도구와 곡식을 가져와 땅을 갈아 농사를 짓고, 염소와 토끼 따위 짐승을 가두어 목축을 하고, 그 수확물을 거두어 저장하고, 섬과 그 지형, 지물에 이름을 붙이고, 도량형으로 섬을 측량하여 지도를 만들고, 집과 별장을 짓고, 헌법과 형법 등 법과 제도를 만들고, 스스로 그 섬의 총독이 되어 그것을 집행하는 등 자신이 떠나온 18세기 영국의 제도, 문물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그리고 식인풍습의 제물이 될 뻔했다가 도망쳐온 원주민인 프라이데이를 그 섬의 백성으로 받아들여 교화하고 계몽하다가, 그 섬에 표류한지 28년여가 흐른 후 지나가는 배를 얻어 타고 다시 본국인 영국으로 귀환한다.

 

이 소설은 한마디로 원시자연에 대한 서구문명의 우월성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서구 근대문명이 어떤 조건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이며 그 밝고 당당한 빛이 어떻게 저 암흑에 갇힌 원시와 자연을 밝히는가는 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타자(他者) , 자연과 그 원주민(原住民) 인간뿐만 아니라 그 땅에 일찍부터 서식해온 동식물을 포함하여 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이야말로 일방적인 폭력과 파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하여 이 소설은 일찍부터 기독교의 열렬한 전도주의(傳道主義)와 결합하면서 세계를 온통 자국의 식민지로 삼으려는 제국주의(帝國主義)를 정당화하는 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위험성을 다분히 노정(露呈)하고 있다.

 

한편, 이 책,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프랑스 현대문학의 거장 미셀 투르니에의 처녀작(處女作)으로,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을 뒤집어 다시 쓴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원주민 방드르디가 전면에 나선다. '방드르디''금요일'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다니엘 디포의 소설에서 로빈슨 크루소가 노예로 삼았던 원주민에게 붙여 주었던 '프라이데이'와 같은 뜻이다.

 

이 책의 전반부는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과 그 맥락이 대체로 일치한다. 이 책에서도 로빈슨 크루소는 스스로 스페란차라고 명명한 그 무인도에 자신의 고국인 영국의 문명(文明)과 제도(制度)를 이식하고 재현한다. 그러면서도 조금씩 자신이 이루어 놓은 그 문명에 대해 회의하고 갈등한다. 그리고 서서히 스페란차 그 자체, 대지의 질서에 동화되어 간다. 그는 대지의 나무와 하늘의 태양과 합일하고 풀을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자기 등장한 방드르디의 존재는 로빈슨 크루소가 그동안 이룩해 놓은 질서를 완전히 흔들어 놓는다. 서구문명을 알지 못하는 방드르디의 눈에 비친 성서(聖書)를 읽고 설교(說敎)하는 로빈슨 크루소의 모습은 낯설고 기이할 수밖에 없다. 이 야만인을 길들이기 위해 로빈슨 크루소가 도입한 법률과 화폐거래 제도를 통한 훈련은 그 진지함만큼이나 우습다.

 

사실 방드르디가 출현하기 이전부터 저 원시의 고립된 섬 스페란차에서 근대적 시간관, 합리주의 지성이라는 미덕, 거래수단으로서의 화폐제도, 각종 법적 제도장치들, 수확물의 축적 같은 서구 근대문명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아비투스(habitus: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제창한 개념으로 일정하게 구조화된 개인의 성향체계, 쉽게 말하면 후천적으로 습득한 취향이나 관습)를 그대로 답습한 로빈슨의 이러한 행위는 방드르디의 출현으로 인해 그 기만성이 여지없이 폭로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만성은 방드르디의 순진한 부주의로 인해 동굴에 쌓아둔 화약이 폭발하면서 극적으로 전환된다. 스페란차에는 더 이상 서구근대문명의 잔영(殘影)은 남아있지 않고 방드르디와의 관계도 주종관계에서 대등한 관계로 전환되면서 청교도적 신념에 가득 찼던 로빈슨 크루소의 인식에도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시간에 대한 강박이 무너지면서 문명의 시간과 결별한 그는 방드르디에게서 분명하고도 과격한 아름다움, 자연스럽고도 상쾌한 우아함을 발견하고 그 자신도 거기에 서서히 동화되어 간다. 그리고 마침내 문명으로 그를 다시 데려갈 화이트버드호가 스페란차에 기착(寄着)했음에도 로빈슨 크루소는 남고 오히려 방드르디가 떠난다.

 

이 책은 미셀 투르니에가 1967, 43세에 발표했는데, 출간 즉시 엄청난 찬사와 더불어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소설 대상을 수상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니엘 디포의 소설을 고쳐 쓴 것에 불과한 이 책에 대해 그렇게 엄청난 찬사와 축복이 쏟아지게 한 것일까. 많은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美德)은 타자의 시각에서 서구근대문명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점에 있지 않을까 싶다.

 

주지하다시피, 서구근대문명은 중세(中世)의 신() 중심에서 그 관심의 방향을 인간(人間)의 이성(理性) 중심으로 전환하는 데서 출발한다. 우주만물의 운행원리가 신의 섭리(攝理)라는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에서 인간이성에 의해 탐구가 가능한 것으로 인식이 전환되면서, 인간이성의 밝은 등불로 비춰보기만 하면 자연이든 사회이든 우주든 어둠에 가려져 있던 원리(原理)나 법칙(法則)이 모두 밝혀질 수 있고 그 원리나 법칙을 이용하여 대상(對象)에 적절한 조작을 가하기만 하면 인류와 역사는 무한히 발전하고 진보하리라는 생각. 이성의 밝은 빛을 가진 인간은 위대하고 아직까지 어둠과 혼돈에 싸여 있는 자연과 야만은 열등하며, 밝은 문명이 어두운 원시와 야만을 계몽하고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구교(舊敎)에서 신교(新敎)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종교개혁(宗敎改革), 왕과 귀족의 지배체제에서 부르주아 지배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정치혁명(政治革命), 천동설(天動說)에서 지동설(地動說),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케플러, 뉴튼 등으로 대표되는 자연과학(自然科學)의 비약적 발전을 의미하는 과학혁명(科學革命)과 이에 터 잡아 이루어진 증기기관, 기차, 증기선 발명 등으로 대표되는 기술혁명(技術革命), 종래의 수공업적 생산방식에서 자본제적 대량생산방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산업혁명(産業革命) 등이 서구근대문명의 근간(根幹)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인가. 밝은 등불이 어둠을 밝혀야 한다는 저 거창한 계몽주의(啓蒙主義)로 무장한 서구 유럽이 종교와 무기를 앞세워 지구의 나머지 4/5를 차지하는 엄청난 사람과 자연을 수탈하고 착취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양차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대규모 학살이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이 책은 바로 원시와 자연을 대표하는 방드르디라는 타자(他者)의 시각으로 저 서구 근대성의 허구성과 폭력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셀 투르니에는 원시(原始)와 문명(文明)의 이분법적 갈등을 우주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 사이의 자유로운 관계를 수용하는 것으로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조직성은 자연에서 오는 것이고 무질서는 문화에서 오는 것이라는 발상의 전환으로써 말이다. 이 책의 어느 한 구이다.

 

 ----야성적인 상태로 되돌아가자 염소는 더 이상 인간의 사육으로 인하여 강요받던 무질서 속에 살지 않게 되었다 짐승들은 가장 힘세고 가장 현명한 숫염소들이 거느리는 계통이 확실한 떼로 무리를 지었다.-----

 

이밖에도 이 책에서 음미할만한 철학적 주제들은 도처에 숨겨져 있다. 좁고 앝은 내 철학적 견문(見聞)에도 노자와 루소, 니체와 훗설과 하이데거와 짐멜과 보들레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인다. 3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짧은 분량의 이 책에서 이만큼 많은 생각할 거리를 자연스럽게 집어넣을 수 있는 작가의 역량이 놀랍다. 일찍이 소르본대학에서 질 들뢰즈, 미셸 푸코 등과 함께 가스통 바슐라르, 장 폴 사르트르,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지적 세례를 받으며 철학을 전공한 작가의 독특한 이력 때문일 것이다.

 

문학적 기교면에서도 이 책의 미덕은 많다. 전체 문장을 총 12장으로 나누고 그 내용과 비중을 유기적이고 짜임새 있게 배치한 점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항해일지라는 장치를 통하여 3인칭 시점과 1인칭 시점을 유효적절하고 자유롭게 구사함으로써 객관과 주관의 풍경을 풍요롭게 드러낼 수 있는 작가의 역량이 놀라웠다.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이라는 소설의 패러디라는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이 책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지불해야 했다.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조금만 딴 생각을 해도 내용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수많은 상징과 생각할 거리가 넘쳐났다. 한 번의 독서만으로 이 책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하기는 무리인 듯싶다. 나도 언젠가 이런 문장을 써보고 싶다. 혼곤하게 잠들어 있어 도무지 꿈적도 하지 않는 영혼(靈魂)을 화들짝 깨워 일으키는 전압(電壓) 높은 문장(文章)---

 

2014827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 月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