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조지훈(趙芝薰: 1920. 12.03∼1968.05.17)
[생애]
시인ㆍ국문학자. 본관은 한양(漢陽). 본명은 동탁(東卓). 1920년 12월 3일 경북 영양군 일원면 주곡리에서 8·15해방 직후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조헌영(趙憲泳)과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사이에서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맏형 동진(東振)은 요절했으나 〈세림시집〉을 펴낸 시인이었다.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운 뒤, 3년간 영양보통학교를 다녔다. 서울로 올라와 1939년 혜화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학교) 문과에 입학해 〈백지〉 동인으로 참여했고, 조연현 등과 친하게 지냈다. 1941년 21세에 혜화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에 앞서 20세에 안동 출신의 김난희(金蘭姬)와 혼인하였다.
1939년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1940년 〈봉황수〉(鳳凰愁)로 〈문장〉(文章)지의 추천을 받아 시단에 데뷔했다.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정서를 노래한 시풍으로 기대를 모았고,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1946년《청록집》(靑鹿集)을 간행하여 ‘청록파’라 불렸다.
1941년 대학을 졸업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로 있었고, 이때 〈금강경오가해 金剛經五家解〉·〈화엄경〉 등의 불교서적과 노장사상, 당시(唐詩)를 즐겨 읽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참여했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신문을 받았다. 이듬해 고향으로 내려가 지내다 8·15해방이 되자 다시 서울로 와서 명륜전문학교·경기여자고등학교에서 강의했다.
1946년 전국문필가협회 중앙위원 및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고전문학부장을 역임했고, 1947년 동국대학교 강사를 거쳐 고려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6·25전쟁 때는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장으로 중부전선에서 종군했고, 4·19와 5·16을 계기로 현실에도 적극 참여하여 시집 《역사(歷史) 앞에서》와 유명한 《지조론》(志操論)을 썼다. 1961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시인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1963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이 되면서 시쓰기보다 〈한국문화사대계〉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데 힘썼다. 그 뒤 1965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편찬위원, 1966년 민족문화추진위원회 편집위원,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68년 5월 17일 토혈로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군 마석리에 안장되었고, 1972년 서울 남산에 시비가 세워졌다.
[문학세계]
조지훈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훌륭한 시인의 한 사람이다. 소위 청록파 시인으로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일제 식민 통치 말기에 민족의 얼과 정서를 지키기 위해 숨어서 시를 쓴 민족적 전통시인이다. 제2차 세대전이 종식되고 일제의 식민통치의 굴레에서 벗어나 조국광복을 맞이한 후 카프 문인들의 이데올로기적 프로문학에 대항하여 순수문학을 옹호했고, 6ㆍ25전쟁 때에는 종군문인단을 결성하여 생사를 걸고 전쟁터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였으며, 종전 후에는 자유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지조의 시인으로서 또 양심 있는 지성인이요 학자였다. 결국 그를 지조와 절개의 시인이요 학자이며 고고한 선비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러한 그의 생애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시인 조지훈은 1920년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동에서 부친 조헌영과 전주 이씨 사이의 3남 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조선조 대대로 문벌이 융성한 전통적 유교가문이었다. 특히 13대 호은공 조전 이후 현재까지 가문의 기반이 되어온 영양군 일월면 주곡동에 세워진 월록서당은 유년 시절부터 소년 시절까지 그의 교육을 담당한 곳이다. 현재도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이 월록서당은 그의 문학적 재능과 학자적 탐구정신과 지절의 선비적 정신을 계발하게 한 발원지가 되었다. 그는 이 서당에서 한문학, 조선어, 수신, 역사, 도서 등을 배우며 정심수덕(正心修德), 안빈낙도(安貧樂道), 상문호학(尙文好學)하는 유교적 인간관을 확립하고 문학적 소양을 기르게 된다.
그리고 시인 조지훈의 시세계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이고 획기적인 계기가 된 것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혜화전문학교를 다닌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문학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경향파 문학을 거쳐 시문학파의 영향을 받았고, 탐미주의, 상징주의, 아방가르드 문학,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등에 경도되었다. 그의 독서체험은 키츠, 예이츠, 발레리, 콕토, 릴케, 헤세 등과 도연명, 이백, 두보, 한산, 백락천, 소동파, 육방옹 등의 작품을 탐독하였고, 성서, 그리스 신화, 유교, 불교, 노장을 함께 읽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독서체험은 그의 시세계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시인 조지훈의 문학수업은 평행하는 두 줄기의 문학세계, 곧 서구지향적인 시세계와 한국적 전통지향적인 시세계를 형성하게 한 근원이 되었다. [백지(白紙)] 동인 시기에 쓰여진 <화상기(華悲記)> <계산표(計算表)> <진단서> <공작(孔雀)1,2> 등 탐미주의적ㆍ모더니즘적 경향의 시들과 1939년 3월 [문장]에 <고풍의상(古風衣裳)>을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에 <승무(僧舞)>의 추천과 1940년 2월에 <봉황수(鳳凰愁)> <향문(香紋)>으로 추천을 완료한 시들이 그것을 입증해준다. 이러한 습작기의 시들이나 추천 시기의 시들의 성격은 그의 시세계의 전개과정을 예측하게 해준다.
그러면 시인 조지훈의 시세계의 본령은 무엇일까. 그의 시세계의 변모과정을 통해 그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의 시세계의 변모과정은 그의 생애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와 같은 생애와 시세계의 변모과정은 그 특성에 따라 6기로 구분할 수 있다.
(1) 제1기(1930∼1939) 자아 상실
이 시기는 문학수업(1930-1936)과 습작기(1936∼1939)나눌 수 있다. 문학수업기에는 유교적 전통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또한 외국 동화, 동시를 통해 문학에 대한 기초적 소양을 쌓기 시작한다. 이러한 문학수업은 습작의 준비단계이기도 하다. 조지훈은 16세가 되어 습작기에 들어서는데, 이때 두 전통 사이에서 고민을 하게 된다. 즉 서구적 전통에 기반을 둔 문학적 체험과 유교적 전통에 기반을 둔 정신적 체험 사이의 갈등이 그것이다. 그의 갈등은 심미주의적, 모더니즘적 시 속에서 잠정적으로 해소된다. 여기 해당되는 작품으로는 <화비기> <월광곡> <백접(白蝶)> <재단실(裁斷室)> <계산표(計算表)> <인쇄공장>이다.
(2) 제2기(1939∼1940) 자아 모색
이 시기는 신교육 및 불교 교육을 통해 자아를 찾는 시기이며, 조부 조인석의 슬하를 떠나 상경하여 혜화전문학교에서 수학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 그는 [문장]에 시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한다. 그가 시세계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만난 전통문화와 민속은 지훈의 시세계를 민족적 전통지향으로 이끈다. 여기에 해당되는 작품으로는 <고풍의상> <봉황수> <무고(舞鼓)> <승무> <가야금> <고조(古調)> <향문(香紋)>이다.
(3) 제3기(1941. 4월∼12월) 자아 확립
이 시기는 학업을 끝내고 월정사 강원 강사 생활을 한 시기이다. 이 시기는 인간으로서뿐만 아니라 시인으로서 가장 의욕적인 모습을 보여준 시기로 [문장] 추천시가 보여준 전통 지향적 경향에서 순수서정시로 전환된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관조적, 선적 자연과의 만남을 통해 그의 문학세계가 절정을 이룬다. 그가 주장한 시의 순수서정성과 전통민족문학의 건설이라는 문학관을 이 시기의 시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해당되는 작품으로는 <산방(山房)> <산 1, 2> <정야(靜夜)> <고사(古寺)> <밤>이다.
(4) 제4기(1942∼1945) 자아 갈등
일제의 식민지 탄압이 극한에 이르렀던 이 시기에는 민족말살정책으로 말과 글을 빼앗긴다. 친일문학이냐 저항문학이냐 소극적 은둔문학이냐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대다수의 문인들은 친일문학을 택하지만 조지훈은 후자를 택한다. 이렇듯 냉혹한 현실에 부딪친 그의 자아는 극심한 갈등에 빠지게 되며 방랑과 향수와 기다림의 정서가 시로 표출된다. 여기에 해당되는 작품으로는 <파초우(芭蕉雨)> <완화삼(玩花衫)> <고목(枯木)> <율객(律客)> <낙화(落花)> <피리를 불면> <창(窓)>이다.
(5) 제5기(1945∼1959) 자아 탐구
해방과 6ㆍ25전쟁 1950년대에 해당된다. 식민지의 타율적인 공간에서 해방의 자율적인 공간으로 바뀌었지만, 순수와 비순수, 순수와 참여, 민족문학과 프로문학의 이데올로기적 투쟁과 분열, 6ㆍ25전쟁, 자유의 이상과 현실정치 사이의 모순 등으로 끊임없는 혼란이 이어진다. 결국 조지훈과 현실사회와의 만남은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의욕과 갈등이 교차하는 이차적인 대립상을 보여주며 그는 그 속에서 부단한 자아 탐구의 자세를 시로 형성화해낸다. 여기에 해당되는 작품으로는 <풀잎단장> <화체개현(花體開顯)> <코스모스> <그리움> <병(病)에게> <손> <절정> <역사 앞에서> <눈 오는 날에> <묘망(渺茫)>이다.
(6) 제6기(1959∼1968) 자아 발견
1960년대의 사회적 격동기에 해당한다. 그는 시, 학술, 문단 활동 등 모든 것에 종지부를 찍고 타계한다. 계속되는 자유, 민주에 역행하는 정치, 사회적 모순과 비리, 그런 역사적 현실 속에서 그는 외롭게 지조를 지키며 시작(詩作)을 쉬고 학문의 길로 눈을 돌린다. 다시 말해 조지훈은 역사적 현실과 만나게 되지만 그 속에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오히려 시집 <여운>을 통해 자신이 걸어온 역사, 자아의 세계를 성찰하는 자세로 시집을 내보낸 것이다. 이 시집에는 자신이 탐구해온 자아의 참모습을 발견하려는 자세가 결집되어 있다. 여기에 해당되는 작품은 <설조(雪朝)> <추일단장(秋日斷章)> <아침> <여운> <범종(梵鍾)> <혼자서 가는 길> <종로 5가> <눈> <폼페이 유감(有感)> <귀로(歸路)> <혁명>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변모해 해온 시세계 속에서 가장 조지훈다운 그의 시세계의 본령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와 자연의 동질성에서 찾을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조지훈은 1939년 일제 말기 최고의 문예지인 [문장]을 통해 시단에 등장한 시인으로 전통적 서정성을 현대시에 계승, 발전시킨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이다. 그의 시의 제재와 주제, 그리고 형식과 언어에 있어서 드러나는 전통성은 이러한 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제재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문화와 자연 관조, 선(禪) 취미 등을 채택한 것이라든가 시형과 시어에 있어서 고아한 품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의 시세계가 한국문학의 전통(지속성)에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지향적 시세계가 처음부터 선험적으로 형성되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그러하듯이 지훈 또한 그 제재 및 주제의 이행과정에서 볼 때 여러 단계의 변모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행과정을 거쳐서 그의 시는 강렬한 전통지향성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세계의 변모는 한마디로 습작기의 서구지향성에서 [문장]의 추천 이후의 전통지향성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외형적인 시세계의 변모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에는 어떤 일관성이 내재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아에 대한 탐구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조지훈의 초기적 유년기에서 청소년기에 이르는 동안 조선 전통의 서당식 교육과 학교 교육을 통해서, 그리고 그 자신의 문학수업을 통해 획득한 서구문학의 영향 속에서 출발한다.
사실 이러한 문학적 출발은 우리 문학사에서 그리 예외적인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초기 한국 시단을 풍미한 서구시의 강력한 영향이 갓 습작을 시작한 조지훈의 시적 감수성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의 초기 시작품으로 <화비기(華悲記)> 계열의 시와 <계산표> 계열의 시에 나타나는 서구지향성은 아직 정신적으로 미숙한 단계에 머물고 있는 한 젊은 시인의 어설픈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적인 관심은 객관적 현실세계의 문제보다는 자아의 내면적인 세계와 이의 심미적인 표현에 집중되었고, 따라서 그러한 어설픈 서구 풍조의 모방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적 세계의 심미적 표현이란 보다 더 깊은 정신적 기초를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잠시나마 심미주의와 모더니즘에 경도되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내적 세계의 심미적 표현을 위해 필요한 정신적 토대를 찾는 일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직 서구편향적인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당대 한국 시단의 어쩔 수 없는 한계였고, 습작기를 채 벗어나지 못한 조지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심미주의와 모더니즘 역시 서구의 정신사에 연결된 것이라는 점에서, 지훈이 추구하는 내면적인 세계의 심미적 표현을 위한 정신적인 근거로서는 불충분한 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조지훈의 딜레마를 해결해준 것은 그를 「문장」에 추천해준 정지용이었다. 정지용은 조지훈에게 서구지향적인 시의 경향을 버리고 한국적 전통지향적인 서정시를 쓸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지용의 처방은 조지훈이 지향하는 바, 자아의 내적 세계의 심미적 표현이 무엇에 근거해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꿰뚫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 지용의 충고를 받아들임으로써 조지훈의 시는 보다 더 안정된 기반 위에서 자아의 내적 세계를 탐구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정신적 준거가 결여된 서구지향성이 필연적으로 표피적인 모방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인 반면, 그 자신의 삶과 정신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전통적인 세계를 기초로 함으로써 그는 비로소 한 개인의 자아를 형성하고 있는 어떤 근원적인 힘의 존재에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지훈이 도달한 근원적인 힘이란 사실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시 속에서 전통문화, 민족정서, 불교와 선미 등 여러 가지 형태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자연’이라는 포괄적인 용어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문화란 사실상 자연에서 출발된 것이고, 서구적인 정신과 동양적인 정신의 변별점 역시 자연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근원적인 방식의 차이에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연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정신적 자세란 시대에 따라서, 또 사회적 조건에 따라서 다소 다르게 발현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하나의 문화권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내면적 질서와, 개별적인 자아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정신적 토대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자아를 탐구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던 조지훈의 시세계가 도달하게 되는 궁극적인 귀결점이 동양적 자연이라는 사실은 필연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많은 연구자들이 조지훈 시의 근원적인 세계로 ‘자연’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조지훈이 탐구한 자아와 그 배후에 존재하는 자연이 그의 시 속에서 어떻게 변용되어 나타났을까? 조지훈은 시에 있어서 영감과 주의력이 협동하는 창조적 무의식을 상상력이라고 규정하면서, 시란 이것들이 일체화된 ‘상상적 실현’이며 따라서 가공의 허구가 아닌 ‘생활의 진실한 체험의 표현’이기 때문에 ‘자연’으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가 지적한 자연이란 말할 것도 없이 동양적 자연이요,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생활 속에 밀착된 자연이다.
결국 그의 시작품의 근원적 세계인 ‘자연’이란 좁게는 순수한 대상적 자연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넓게는 그가 체험한 삶 전체를 포괄하는 자연인 셈이다. 이 ‘자연’은 그의 시 속에서 때로는 순수한 대상적 자연으로, 또 때로는 전통문화나 민족정서로 혹은 불교적 선미 등으로 변용되어 나타난다. 특히 이 ‘자연’은 그의 정신세계를 끊임없이 괴롭혀온 자아의 문제와 결합되면서 역사의식의 문제로 확대되기도 한다. 따라서 자아에 대한 응시는 곧 ‘자연’에 이르기 위한 것이고 자연에 대한 관조는 다시 자아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순수서정시와 민족문학을 지향하는 그의 문학관에 비춰보면, 그가 자연을 통해 탐구한 자아의 내용은 한편으로는 인간,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연은 자아의 배후에 존재하는 거대한 근원적인 질서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조지훈은 초기의 심미주의와 모더니즘 경향의 시를 통해서 시세계에서 탐구한 자아의 문제와 자연의 본질을 해명하려고 시도했으나 전통적 가문과 유교적 인간관을 바탕에 깔고 형성된 그의 생애가 그와 같은 서구지향적 시를 수용하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그가 창조한 시세계는 민족전통지향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전통지향의 시세계에서 자아와 배후에 존재하는 근원적 질서의 총체인 자연을 탐구했다. 그리고 그 자연은 동양적 자연이요 선적 자연이며, 허무주의적 자연이다. 또 근원적인 세계인 자연은 해방 이후 사회와 인간과 역사로 전이되는 것이다.
[생가]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 있는 조지훈의 생가.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 한국 시단(詩壇)의 대표적인 시인이며, 국문학자이기도 한 조지훈이 탄생한 집으로 6ㆍ25 때 불탄 것을 중건하였다. 원래 조선조 인조 때 주곡리에 입향한 조전(趙佺)의 둘째 아들 정행(廷行)이 창건했던 집이다. 대문ㆍ곳간채와 사랑이 부설된 안채가 현존한다.
대문간채는 솟을대문 좌우로 2칸씩이 건조된 구조이다. 문간 다음에 방이 각 1칸씩 있고, 그 방에 이어 부엌으로 조성되었다. 솟을대문 문 인방(引枋: 기둥과 기둥사이에 문호를 사이로 가로지른 나무) 위에 살대를 꽂았다. 솟을대문은 맞배지붕으로 좌우 건물은 팔작지붕으로 마감하였다. 곳간채로 들어가는 사주문(四柱門)이 대문간채 옆에 따로 있어 곳간채의 출입에 전용되고 있다. 사주문 옆에 측간이 있다.
곳간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 대문간채를 바라다보며 자리 잡았다. 바닥은 맨바닥, 벽체는 토벽이며 지붕은 기와를 이은 우진각 지붕이다. 안채는 대문간채와 곳간채가 있는 반듯한 마당 안쪽에 있다. 중문 칸이 정면 중앙에 있는데 한가운데 있지 않고 왼쪽으로 한 칸 치우쳐 있다. 사랑채의 평면이 고려된 것이다.
사랑채는 겹집형으로 2칸통인데 중문 칸에 이어 사랑방 두 칸이 연속된다. 방 앞엔 툇마루 뒤편엔 쪽마루가 있고 사랑방에 이어 2칸통 대청이 있다. 중문도 2칸통이다. 보통 문을 1칸으로 잡는 것과 차이를 보인 특색이다. 문 좌측도 역시 2칸통의 2칸이며 방과 보일러실이 있다. 보일러실 북측으로 다락이 있는 부엌이 있고 안방으로 이어지는데, 안방의 아래 칸을 조지훈의 태실(胎室)이라 부른다. 조선 말기의 의병장이던 조승기(趙承基), 6ㆍ25 때 자결한 조부 조인석(趙寅錫)이 이 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안방에서 우측으로 정면 3칸의 대청이 있고 다음에 건넌방이 있다. 건넌방에 이어 도장〔閨房〕 3칸이 남북으로 길게 조성되었으며 이어 방 그리고 사랑채로 이어지는 구성이다.
[작품감상]
고풍의상(古風衣裳)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曲線)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초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접(胡蝶)이냥 사푸시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감고 거문고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이냥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승무(僧舞)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봉황수(鳳凰愁)
벌레 먹은 두리 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아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낙화(洛花)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완화삼(玩花衫) - 木月에게 -
차운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리(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냥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나그네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파초우(芭蕉雨)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는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풀잎 단장(斷章)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이 피어오르는 한떨기
영혼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