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및 여행기

춘몽(春夢)[소매물도 산행기]

월지 2011. 3. 7. 20:07

 

거제도 저구항을 출발한 배가

하얗게 물살을 가르며 바다 위를 거침없이 질주한다.

 

그러나 사방이 섬과 육지로 둘러쳐져 있어

바다가 바다 같지 않고 오히려 호수 같은 느낌이다.

 

 

파도가 일지 않은 수면은

햇살이 반사되어 기름을 풀어놓은 듯 반들거린다.

 

뱃전에 오르자마자 벌어진 술판에 끼여

소주 몇 잔을 얻어 걸치고 나니 위장이 짜르르하고

정신이 몽롱해지며 취기(醉氣)가 몰려온다.

문득 고산(孤山) 윤선도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의 몇 구절이 떠오른다.

 

 

앞 갯가에 안개 걷히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물러가고 밀물이 밀려온다.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강촌에 온갖 꽃이 먼빛에 더욱 좋다.

 

날씨가 덥구나. 물 위에 고기 떴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 하는구나.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낚싯대는 쥐고 있다 탁주병은 실었느냐.

 

동풍이 잠깐 부니 물결이 곱게 인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동호(東湖)를 돌아보며 서호(西湖)로 가자꾸나.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앞산이 지나가고 뒷산이 다가온다.

 

우는 것이 뻐꾹새인가 푸른 것이 버들숲인가.

배 저어라. 배 저어라.

어촌의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들락날락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맑은 깊은 연못에 온갖 고기 뛰어논다.

 

 

고운 볕이 내려쬐니 물결이 기름 같다.

배 저어라. 배 저어라.

그물을 넣어둘까 낚싯대를 놓아둘까.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어부가(漁父歌)에 흥이 나니 고기도 잊겠구나.

 

석양이 기우니 그만하고 돌아가자.

돛 내려라. 돛 내려라.

물가의 버들 꽃은 굽이굽이 새롭구나.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정승도 부럽지 않다 만사(萬事)를 생각하랴.

 

방초(芳草)를 밟아보며 난초(蘭草), 지초(芝草)도 뜯어보자.

배 세워라. 배 세워라.

한 잎 조각배에 실은 것이 무엇인가.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갈 때는 안개더니 올 때는 달이로다.

 

 

취(醉)하여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내렸다가.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떨어진 꽃잎이 흘러오니 신선경(神仙境)이 가깝도다.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인간(人間)의 붉은 티끌 얼마나 가렸느냐.

 

낚싯줄 걸어 놓고 봉창의 달을 보자.

닻 내려라 닻 내려라

벌써 밤이 들었느냐. 두견 소리 맑게 난다.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남은 흥(興)이 무궁하니 갈 길을 잊었더라.

 

내일이 또 없으랴. 봄밤이 그리 길까.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낚싯대로 막대 삼고 사립문을 찾아보자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어부(漁父)의 평생이란 이러구러 지낼러라.

 

 

매물도(每勿島).

통영시 한산면 매죽리에 속한 세 개의 섬,

즉 대매물도, 소매물도, 등대도를 통틀어 일컫는다.

그 생긴 형상이 메밀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배는 대매물도를 지나

저구항을 떠난 지 40여분 만에

소매물도 선착장에 닿는다.

 

 

 

 

선착장에 내려서자마자

길은 가파른 오르막이다.

길가 산비탈에는 폐가에 가까운 오두막집과

날렵하고 산뜻한 현대식 펜션 건물이 공존하고 있다.

이 섬의 과거와 현재가 그대로 전시되어 있는 듯하다.

 

 

 

20~30분을 걸어 올라가자

산 능선에 자리 잡은 작고 아담한

소매물도 분교장이 나온다.

 

 

1961년부터 1996년까지

131명의 학생을 배출하고 폐교하였다고 하는데

퇴락한 교사와 사택이 세월의 더께를 뒤집어쓴 채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망태봉 정상에는 감시서(監視署) 건물의 잔해가 남아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인근 바다를 지나는 밀수선을 감시했다고 한다.

 

 

 

 

망태봉을 지나자

등대섬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소매물도 본섬과 등대섬은 자갈밭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밀물 때는 물에 잠겼다가 썰물 때는 드러나 통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 풍광(風光)이 가히 절경(絶景)이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가파른 계단 길을 내려가

등대섬으로 건너가려 하는데

뭍으로 출항하는 배 시간이 촉박하여

등대섬까지 가는 것은 무리라 한다.

 

 

파도가 쓸고 가는 자갈밭에 주저앉아 점심을 먹는다.

이중희 직전 회장님 내외가 준비한 회무침의 맛이 꿀맛이다.

안주가 좋으니 소주잔이 연신 비워진다.

 

 

반주를 겸한 식사를 마치고 나니

다시 불콰한 취기가 몰려온다.

 

 

왔던 길을 되짚어 올라오니 울창한 동백(冬栢)의 숲이다.

땅바닥에 동백꽃의 시신들이 질펀하게 깔렸다.

갑자기 눈앞이 어질어질하다.

 

 

어릴 적 작은 누이가

자주 베갯모에 수놓던 꽃.

그 꽃이 바로 동백이 아니던가.

 

그 꽃은 동백아가씨와 섬마을 선생님 따위

당시 한창 유행하던 이미자의 노래와 뒤섞여

어린 나의 몽롱한 의식 속에 막연한 기다림과

묘한 설레임으로 각인되었다.

 

 

그렇다.

봄은 단순한 예감이 아니라

이미 눈앞에 와있는 현실이었다.

그 명백한 사실의 망각(妄覺)과 갑작스런 각성(覺醒)이

기다림과 설레임의 기억에 대한 환기(喚起)와 더불어

꿈꾸는 듯 눈앞이 어질어질하였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재바르고 부지런한 섬마을 아낙들은

벌써부터 썰물의 갯벌에서 봄을 캐고 있었다.

 

2011년 3월 6일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 月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