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및 여행기

직관(直觀)의 혈처(穴處)를 찾아서[학풍회 2010년 10월 간산기]

월지 2010. 10. 15. 12:58

연호당 - 이현당 선배님의 시골집

 

모든 이론(理論)은 종국적으로 현실(現實)과의 정합성(整合性)을 지향한다. 이론이 현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예측하여 현실에 영향을 줄 수 없다면 그것은 단순한 관념의 유희일 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현실을 100% 정확하게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는 이론은 없다. 현실은 복잡하고 미묘하며 끊임없이 변해가기 때문이다. 거기다 이론은 언어(言語)를 그 주요한 도구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바, 이 언어라는 것이 사실은 대단히 불완전하고 어설픈 것이어서 그렇게 믿을 것이 못 된다.

 

불완전하고 어설픈 언어에 의존해야 하는 근본적인 한계에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복잡, 미묘한 현실과의 정합성을 높이기 위해 이론은 날로 복잡하고 어려워진다. 그리하여 이론은 마침내 복잡한 언어의 미로 속으로 빠져들어 그 분야의 전문가들끼리도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공통적인 논의의 틀에 대해 합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럴 경우 이론은 현실과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고 이론을 위한 이론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이론의 들판에 남는 것은 무수한 언어들의 시체뿐이다.

 

이럴 때 우리가 언어와 이론을 뛰어넘어 현실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믿을 만한 방편은 없을까. 있다. 바로 직관(直觀)이라는 방법이다. 물론 직관을 통한 정확한 현실의 통찰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의 강물과 많은 경험의 골짜기와 깊은 사색의 들판을 건너가야 한다.

 

풍수지리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명당(明堂), 다시 말해 땅속에서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생기(生氣)가 발출하는 구멍 즉 혈(穴) 자리를 찾는 것이다. 풍수지리학의 큰 틀이라 할 수 있는 형국론(形局論), 형세론(形勢論), 이기론[理氣論: 좌향론(坐向論)이라도 한다]이 모두 어떠한 자리에서 생기가 발출하고 어느 방향으로 자리를 잡아야 그 생기가 온전하게 보존되고 작용할 것인가를 논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자리를 보더라도 각 이론이 말하는 혈처가 다르고, 또 같은 이론에 입각하더라도 논하는 사람마다 혈처가 다르니 초학자들은 어느 것이 똥이고 어느 것이 된장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럴 때는 복잡한 논(論)과 설(說)을 떠나 우리를 현장으로 데리고 가서, “자! 봐라. 이런 곳이 바로 명당이다.“라고 말해 줄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 학풍회에 척 보면 바로 혈 자리가 보이는 그런 고수(高手)가 있는가. 있다. 바로 이현당 선배님이다. 선배님은 복잡한 도시생활을 떠나 10여년 전에 이미 궁벽한 시골로 들어가 지금까지 한적한 전원생활을 하고 계신 분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풍수학에 몰입하면서 수많은 현장을 답사하여도 혈 자리가 보이지 않더니 복잡한 이론의 족쇄를 던져버리고 나자 비로소 조금씩 혈 자리가 보이기 시작하더란 것이 선배님의 전언이다. 이 정도의 경지라면 신통(神通)이 열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학풍회 10월 간산은 이론을 떠난 직관으로 혈 자리를 찾는 이현당 선배님의 안내에 따라 경주 양남과 외동 일대의 혈처를 답사하기로 하였다. 10여명의 회원들이 조야당 선배님이 운전하는 봉고차를 타고 이현당 선배님의 시골집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청일당 선배님으로부터 이현당 선배님의 집안 내력을 들었다. 울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사람들이 이현당 선배님의 친인척이었다. 한마디로 빵빵한 집안이었다.

 

이현당 선배님의 집은 경주 양남에서 외동으로 넘어가는 904번 지방도에서 오른쪽 산골짜기로 조금 들어간 양남면 석읍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길가에 연호당(燕杲堂)이라는 당호가 걸린 흙벽돌로 지은 집이 이현당 선배님의 집이다. 처음에는 산골짜기의 평범한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위성사진으로 확인을 해보니 한 가닥 가느다란 산줄기가 그 집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전에 몇 번 선배님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는 조야당 선배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 집 거실에 가만히 앉아 있어 보면 편안한 느낌이 들면서 한 없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였다.

 

묵밭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에 조성된 무덤. 그러나 혈처는 아니란다.

 

이현당 선배님은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는 길로 우리를 안내하다가 길가의 한 묵밭을 지적하면서 이곳도 자세히 보면 제법 명당자리라고 하셨다. 길 오른쪽으로 한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길을 통과하여 그 밭으로 이어졌다. 이현당 선배님의 말씀으로는 길 오른쪽 산줄기 끝 지점을 혈처로 알로 무덤을 조성해 놨는데 사실은 길 왼쪽인 이 묵밭이 혈 자리라고 했다.

 

악어 선배님이 탐지기를 이용해 묵밭에서 혈처를 찾고 있다.

 

명당탐지기. 대기중에 흐르는 양자에너지를 탐지해 혈처를 찾는단다.

 

한편, 악어 선배님이 길쭉한 안테나가 달린 권총 같은 물건을 꺼냈다. 그리고 묵밭 주위를 크게 원을 그리면서 그 물건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더니 이현당 선배님이 혈처로 지목한 지점에서 멈춰 섰다. 악어 선배님의 말씀으로는 그 물건이 명당탐지기라는 기계로서 대기 중에 흐르는 양자에너지에 반응을 하는데, 명당에는 반드시 사람의 몸에 좋은 양자에너지가 밀집해 있기 때문에 그 기계로 혈처를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그 기계의 작동원리를 이해할 길이 없으니 모두들 무당이 굿할 때 잡는 대나무 같다고 낄낄거렸다.

 

오색토(五色土). 혈처에는 이와 같이 여러가지 색깔의 흙이 분포한단다.

 

이현당 선배님은 다시 석읍 마을 마을회관을 지나 길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더니 길가에 차를 세우게 하고 시멘트 포장길 가운데를 지적하며 이곳도 명당이라고 하셨다. 주위를 둘러보시던 옥상 고문님이 길을 닦으면서 산을 깎아놓은 절개지(切開地)를 지목하며 탄성을 지르셨다.

 

이현당 선배님이 지목하신 혈처. 바로 길 한가운데이다.

 

“저 흙을 봐라. 바로 저게 바로 오색토(五色土)라는 거다. 명당 주위의 흙을 파보면 저렇게 여러 가지 색깔의 비석비토(非石非土)의 흙이 나온다.”

 

안산(案山)

 

곧이어 악어 형님의 명당탐지기도 반응을 했다. 직접 그 자리에 서보니 편안한 느낌이 든다. 차만 다니지 않는다면 가족들과 도시락을 사가지고 와서 한나절 놀다갔으면 딱 좋을 자리다.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니 좌청룡, 우백호의 산줄기가 뚜렷하고 앞으로 보이는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의 형태가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 “이곳으로 길만 나지 않았다면....”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이현당 선배님이 신후지지(身後之地)로 소점(所點)해 둔 가묘(假墓)

 

이현당 선배님이 안산을 가리키고 있다.

 

안산(案山)

 

그 자리에서 완만한 산 능선을 따라 10여분쯤 걸어가자 이현당 선배님이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잡아놓은 가묘(假墓)가 나왔다. 이현당 선배님의 말씀으로는 이 자리는 주능선에서 뻗어 나온 지능선이 완만하게 내려오다가 갑자기 방향을 왼쪽으로 꺾는 지점인데 그 꺾어지는 방향으로 앞쪽을 쳐다보면 멋지게 생긴 안산이 보인다고 했다. 과연 그 안산은 잘 생긴 산이었다. 악어 선배님의 명당탐지기도 뚜렷하게 반응했다.

 

혈자리에 반응하는 탐지기

 

가묘 뒤의 조그만 바위

 

혈자리와 바위의 상관성에 대해 설명하는 옥상 고문님

 

그런데 주위가 울창한 수목으로 덮여 있어 자세히 살피지는 못했으나 가묘 좌우의 산줄기가 좀 짧은 감이 있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바람이 많이 불었다. 혈 자리를 보는 관점도 사람의 성격을 반영하는 듯하다. 가묘 바로 뒤에 조그만 바위가 놓여 있는데 혈 자리와 바위의 상관성에 대해 옥상 고문님의 자세한 해설이 이어졌다.

 

자신의 신후지지를 보면서 살아가는 그 마음자리는 어떠한 것일까. 아마도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님을 매일매일 실감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삶을 살아가면서 얽매이기 쉬운 쓸데 없는 집착에서 많이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함안 조씨 선산

 

가묘에서 주능선으로 돌아와 다시 동남쪽의 지능선을 따라가자 함안(咸安) 조씨(趙氏)들의 선산으로 보이는 몇 기의 무덤이 나왔다. 좌우의 산줄기가 무덤 주위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형국도 좋지만 무덤 앞으로 펼쳐진 수많은 능선들이 겹치고 포개진 모양이 누가 봐도 대번에 명당임을 짐작케 한다.

 

탐지기로 혈처를 찾고 있는 악어 선배님

 

상석(床石)

 

이현당 선배님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어모장군(禦侮將軍)”이라고 새겨진 비석과 상석이 놓인 무덤 앞에 서서 이곳의 혈처에 대해 설명하셨다.

 

이곳의 혈처를 지목하고 계신 이현당 선배님

 

“이 무덤은 혈처를 잘못 잡았다. 이곳의 혈처는 이 무덤과 그 바로 오른쪽 아래에 조성된 며느리 무덤 사이에 있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이렇게 혈처를 잘못 잡은 무덤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 혈처 아래에 무덤을 쓴 곳은 좀 났다. 만약에 혈처 바로 위에 무덤을 쓰게 되면 그 집안은 줄초상이 난다. 이 무덤 자리에서 제일 볼만한 것은 저 앞으로 보이는 안산의 형국이다. 온갖 형태의 안산이 겹겹이 펼쳐져 있다.”

 

안산. 여러 형태의 안산들이 겹겹이 펼쳐져 있다.

 

과연 겹겹으로 펼쳐진 안산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치 아름다운 꽃 봉우리 속에 앉아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현당 선배님의 유창하고 열정적인 강의를 듣고 있는 동안 무덤 뒤편으로 잘 생긴 노루 두 마리가 겅중거리며 달려지나갔다.

 

점심을 먹은 뷔페식당

 

904번 지방도를 타고 외동고개를 넘어왔다. 그리고 다시 7번 국도를 타고 경주 쪽으로 조금 가다가 길가의 한 한식 뷔페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저렴한 가격에 비해 메뉴나 맛이 그런대로 괜찮다. 아침에 회장님이 싸오신 김밥을 너무 많이 먹은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주산(主山)

 

우백호(右白虎)

 

좌청룡(左靑龍)

 

이현당 선배님이 마지막으로 안내하신 곳은 외동읍 죽동리의 한 야산에 있는 파묘(破墓) 터였다. 그곳은 멀리서 보더라도 대번에 명당임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비범한 자리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넓은 들판 한 가운데 야트막하게 솟은 둔덕으로 그 좌우로 길쭉하게 지능선이 펼쳐지고 그 바로 앞으로는 조그맣게 솟은 안산, 그리고 그 너머로 기다랗게 펼쳐진 토함산 자락까지. 한마디로 명당의 교과서 같은 곳이었다.

 

혈처에서 바라본 안산(案山)과 조산(朝山)

 

누가 무슨 연유로 그 명당자리를 파묘했는지는 몰라도 너무나 탐이 나는 자리였다. 사람의 눈은 누구나 비슷한 것일까. 파묘 후 그 터를 포함한 4,000평의 땅을 시가의 4배를 주고 누군가가 구입했단다.

 

혈자리를 표시해 둔 표석(標石)

 

혈처를 지목하고 계신 이현당 선배님

 

혈처를 표시하기 위함인지 파묘한 자리에 조그만 화강석을 박아놓았다. 그리고 악어 선배님의 명당탐지기도 그 자리를 혈처로 지목하였다. 그런데 이현당 선배님은 그 자리는 혈처가 아니라고 했다. 이현당 선배님이 혈처로 지목한 자리는 그로부터 10여미터 위쪽에 있었다. 수긍도 반박도 하기 어려우니 당달봉사가 따로 없다.

 

세계옹기문화엑스포 관람장 입구

 

학풍회원과 천성산문학회원의 만남

 

시낭송회 사회를 보고 있는 신춘희 경상일보 논설위원

 

가을밤은 깊어가고

 

시를 낭송하고 있는 아르사님

 

간산을 마치고 일행들은 세계옹기문화엑스포 관람을 위해 외고산 옹기마을로 향했다. 거기서 천성산문학회 회원들을 만나 시낭송회에 참석하였다. 가을밤은 깊어갔고 시인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그 밤을 시흥(詩興)으로 도도하게 물들였다.

 

2010년 10월 9일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 月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