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진산을 찾아서[학풍회 2010년 3월 간산기]
동래부 동헌에 피어난 매화 곳곳에 매화가 다투어 피어났다. 그윽한 암향이 코를 찌른다. 갑작스런 봄소식이다. 당혹스럽다. 지난주까지만 하더라도 함박눈이 휘몰아친 날씨였다. 지난겨울 내내 지독한 감기와 몸살을 달고 살았다. 제대로 된 산행 한번 못했다. 아무런 준비 없는 이 봄이 반갑기보다는 오히려 두렵다. 학풍회 2010년 3월 간산지는 부산(釜山)이다. 나에게 있어 부산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다. 이 도시는 내 고향 울산에 버금가는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다. 이 도시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시작된 그 인연은 내 20대 전부와 30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사이 1, 2년 정도 이 도시를 벗어나 산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 꽃다운 나이의 대부분은 이 도시에서 흘러갔다. 나는 군대를 다녀와서 대학을 졸업하고도 소위 고시공부를 한답시고 10년 가까운 세월을 이 도시에서 보냈다. 또 그 과정에서 이 도시의 여자를 만나 혼인을 했다. 그러니 이 도시와의 인연은 처가(妻家) 곳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이 도시는 부급구사(負笈求師)하는 한 가난한 시골 유학생(遊學生)을 따뜻하게 받아주고 그를 지적(知的)으로 단련(鍛鍊)시켜 주고 정서적(情緖的)으로 세련(洗練)시켜 주었다. 오늘날 이 도시는 400만 인구의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이자 천혜의 항구를 가진 국제적인 항만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도시의 이름이 가지는 그 휘황한 광휘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일제의 무력시위에 굴복한 강화도조약(1876년)에 따른 부산항의 개항과 한국전쟁(1950년)에 따른 대규모 피란민의 이동이라는 우리 근현대사의 특기할만한 사건들이 오늘의 부산을 있게 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도시는 도성(都城) 서울에서 보면 변방(邊方)의 한 포구(浦口)에 불과하였다. 부산이라는 명칭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東萊富山浦", 신숙주가 쓴『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의 "東萊之富山浦" 등에서 보는 보와 같이 처음에는 ‘富山’으로 포기되었다. 그 후 편찬된『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산천조(山川條)에 "부산(釜山)은 동평현(東平縣: 오늘날 당감동 근처)에 있으며 산이 가마의 모양과 같으므로 이같이 이름 하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釜山浦)이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와 같이 가마 모양으로 생겼다는 산은 부산 동구 좌천동과 수정동을 둘러싼 높이 130m의 증산(甑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로 미루어 부산(釜山)이라는 지명은 “떡을 찌는 시루를 엎어놓은 것과 같은 산의 모양에서 유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증산(甑山)’이라는 산에서 ‘부산(釜山)’이라는 지명이 탄생한 것이다[증산의 '증(甑)'은 부산의 '부(釜)'와 뜻이 서로 통하며 둘 다 떡을 찌거나(甑) 밥을 짓는(釜) 그릇을 나타낸다].
부산의 고지도 한편, 울산의 영남알프스를 경유한 낙동정맥(洛東正脈)은 정족산과 천성산을 지나 금정산(金井山)으로 이어지고, 다시 만덕고개, 금정봉, 백양산, 엄광산, 구덕산, 동매산을 거쳐 다대포의 물운대(沒雲臺)로 이어지며 그 긴 여정을 마무리한다. 부산의 지세는 진산(鎭山)에 해당하는 이 금정산을 주능선으로 하여 낙동정맥이 척추를 형성하고 그 서쪽으로는 유장하게 흘러가는 낙동강과 그 너머로 기름진 김해평야가 펼쳐져 있고, 그 동남쪽으로는 갈비뼈와 같은 몇 개의 지능선이 갈라져 나와 그 사이사이에 몇 개의 구릉성 분지를 형성하고 바다에 잠기는 형국이다. 그리하여 부산은 넓은 평지가 드물고 곳곳이 크고 작은 산들로 가로막혀 있어 산과 산 사이를 수많은 터널이 연결하고 있고 승용차를 가기고 갈 경우 미리 잔돈을 준비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일쑤다. 낙동정맥 동쪽의 부산은 수영강과 그 한 지류인 온천천을 경계로 북쪽의 해운대, 동래와 남쪽의 서면, 부산포, 초량으로 구분되는데 부산항 개항을 전후로 그 중심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다시 해운대와 수영만으로 그 무게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산을 풍수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금정산에서 몰운대로 이어지는 부산의 주능선에서 동남쪽으로 분기한 몇 개의 가지 능선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먼저, 낙동정맥이 천성산에서 금정산으로 이어지기 직전에 계명봉(鷄鳴峰)이 솟아 있다. 이 계명봉에서 한 갈래의 산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 나오는데 노포동 시외버스터미널 옆을 지나 구월산[九月山: 윤산(輪山)이라고도 하는데 그 생긴 모양이 바퀴모양으로 생겨서 ‘구르다’의 경상도 방언인 ‘구불다’는 말이 한자를 차음하면서 구월산이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과 마안산[馬鞍山: 산의 모습이 말의 안장을 닮았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으로 이어져 수영강과 온천천이 합수하는 지점인 원동 근처에서 멈춘다. 수영강과 온천천으로 환포(環抱)된 지역이 동래(東萊)이므로 구월산 또는 마안산이 동래의 진산이 된다. 또 낙동정맥이 만덕고개를 넘어 성지곡 뒷산인 백양산(白楊山)으로 이어지기 전, 그러니까 지금의 사직 야구장 서쪽에, 조그만 봉우리가 하나 솟아있는데 이것이 바로 금정봉(金井峰)이다. 이 금정봉에서 한 갈래의 산줄기가 뻗어 나와 금용산[金湧山: 쇠뫼산이라고도 한다], 화지산(和池山)을 거쳐 황령산(荒領山)으로 우뚝 솟았다가 용당동의 신선대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한편, 백양산을 통과한 낙동정맥이 주례(周禮)를 지나면서 다시 한번 솟구쳐 올라 엄광산(嚴光山)을 이루는데 여기서 다시 한 갈래의 산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 나와 수정산(水晶山)을 거처 바다 건너 영도(影島)로 이어진다. 이번 학풍회 간산지는 낙동정맥에서 동남쪽으로 분기한 몇 개의 지능선 중에서 계명봉에서 분기한 산줄기에 해당하는 동래읍성(東萊邑城)과 와 금정봉에서 분기한 산줄기에 해당하는 화지산 자락의 정묘(鄭墓)이다.
동래향교
동래읍성 대체로 풍수적인 관점에서 한 고을의 진산(鎭山)과 명당(明堂)을 찾으려면 먼저 지방수령이 머물렀던 동헌(東軒)과 지방교육기관인 향교(鄕校)를 중심으로 산세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래읍성은 개항이전까지 부산의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로서 금정산을 조산(祖山), 구월산을 소조산(小祖山), 마안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농주산(弄珠山)을 안산(案山), 황령산을 조산(朝山)으로 하여 장풍(藏風)하고, 온천천과 수영강이 합수하여 득수(得水)한 전형적인 장풍득수의 명당이다. 형국론의 관점에서는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산에서 내려오는 영구하산(靈龜下山) 형으로 보기도 하고 학이 둥지로 날아드는 비학귀소(飛鶴歸巢) 형으로 보기도 한다.
서장대
서장대 읍성은 자연 지형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타원형에 근접한 형태로 평산성(平山城)인데 북쪽과 동쪽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남쪽과 서쪽은 평지로 열려 있어 그 앞으로 넓고 평탄한 분지가 펼쳐진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이다. 또 서북쪽에서 흘러온 온천천이 읍성의 남쪽을 휘감고 동쪽으로 빠져나가 원동에서 수영강 본류와 합수하고 있다.
동래읍성
북문 성문은 남문을 비롯해 서문, 암문, 북문, 동문, 인생문의 6개가 있고 남문과 서문의 연결 도로가 주도로로서 서문으로 연결된 도로는 온천, 부곡동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의 영남대로로 이어지고 남문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부산진성으로 연결되면서 일본과 이어지는 교통의 출발점이었다고 한다.
학풍회원들
동래읍성의 유래와 역사를 설명하는 문화재해설위원 그러나 일제가 도시 근대화를 빙자하여 대부분의 성벽과 주요시설물을 철거․훼손․반출하고 또 성내에 시장을 설치하면서 옛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최근에 시가화(市街化)되지 않은 일부 산 능선을 따라 성벽과 성문, 장대를 복원함으로써 희미하게나마 그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장영실 상 장영실이 동래 관노 출신이라 성내에 장영실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일성정시의
혼천의 읍성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동래향교를 시작으로 완만한 산 능선을 밟으며 간산을 시작하였다. 산릉을 따라 잘 깎은 화강암의 성벽이 이어지고 장대와 성문이 잇달아 나타났다. 문화재해설사가 동행하여 그 유래와 역사적인 사건들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읍성의 대부분을 주택과 아파트가 점령하고 있어 그 전체적인 윤곽을 가늠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나마 박물관에 전시된 읍성의 모형을 통해 그 풍수적인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게 다행이다.
박물관에 있는 동래읍성 축소 모형도 산세를 자세히 살펴보면 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오는 모습 또는 거북이 엎드리고 있는 형국임을 알 수 있다. 시간관계상 서장대(西將臺)를 거쳐 북문(北門)까지만 둘러보고 바로 복천동 고분군이 산재한 부드럽고 야트막한 산릉을 따라 내려왔다. 좌우로 산줄기가 감싸고 있는 그 능선에서 금관가야에 속한 거칠산국의 지배층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 수십 기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 위치로 보아 통일신라 말 도선에 의해 중국의 본격적인 풍수이론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이 땅에 자생풍수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복천 실외 박물관
복천 실외 박물관 안의 무덤 붉게 녹이 쓴 덩이쇠가 보인다. 당시 덩이쇠는 권력과 금력의 상징이다.
복천동 고분군 능선 능선 위의 야외 박물관에 전시된 무덤 안에는 상당한 양의 덩이쇠[鐵塊]가 부장품으로 매장되어 있는데 당시의 가야문화의 선진성을 이를 통해 알 수 있을 것 같다.
동래시장
동래부 동헌
동래부 동헌
동래부 동헌의 축소 모형 동헌은 시끌벅적한 동래시장 한가운데에 섬처럼 외롭게 떠있다. 그 옹색한 부지와 딸랑 두 채밖에 남지 않은 건물에서 일제의 만행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단 하루 동안의 전투로 동래성이 함락되고 불과 20일도 걸리지 않아서 서울이 점령당하는 치욕을 겪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지배층들. 그리고 그 이후로도 백성들의 이용후생(利用厚生)과 경세치용(經世致用)을 도모하기 보다는 민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전례문제와 공리공론으로 대를 이어가며 피터지게 싸우다 종국에는 나라를 망하게 한 그 무능하고 부패한 이 땅의 지배층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유행병처럼 번지는 문화유산답사에서는 그 지배층들이 남긴 집과 무덤을 온갖 이론을 갖다 붙여 찬미하고 있으니 한마디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원조 동래파전집 맛은 있으나 파전 한접시가 3만원으로 가격이 만만치 않다. 동래파전의 원조라고 하는 점포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동래 정씨들의 2대조 호장공 (戶長公) 정문도(鄭文道)의 묘가 있는 정묘(鄭墓)로 향했다. 왕릉을 제외하고 일개 문중에서 아직까지 도심의 넓은 임야를 선산으로 보존․관리하고 있다는 것은 그 터의 명당여부를 떠나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화지공원 입구
현경문
경묘문 이곳 정묘는 앞에서도 검토한 바와 같이 낙동정맥 상의 금정봉에서 분기하여 금용산, 화지산을 거쳐 황령산으로 이어지는 지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화지산의 산줄기는 크게 세 줄기로 갈라져 그 가운데 줄기는 정묘를 향해 곧바로 내려오고 그 좌우의 산줄기는 길게 앞으로 뻗어나가며 가운데 산줄기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특히 백호에 해당하는 오른쪽 산줄기는 길게 뻗어나가 황령산으로 이어지며 정묘의 안산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무덤 바로 앞 좌우에는 두 그루의 오래된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정묘 앞에 심어진 배롱나무
정묘 정묘에 올라 정면을 쳐다보면 저 멀리 세 개의 봉우리로 된 산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 산이 영도의 봉래산(蓬萊山)으로서 조산(朝山)에 해당된다. 또 무덤 뒤를 보면 화지산 정상에서 발출한 산줄기가 좌우로 꿈틀거리고 상하로 출렁거리며 내려오다 봉분 뒤 10여 미터 지점에서 부드럽고 봉긋하게 솟았다가 무덤으로 들어오는데 이 모든 것이 형세론(形勢論)에서 말하는 태식잉육(胎息孕育)의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지산에서 정묘로 이어지는 산줄기
정묘 무덤 좌우로 산줄기가 길게 앞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형국론(形局論)으로 보면 이곳의 산세는 야(也)자의 형국이라고도 하고 연꽃이 열매를 맺어 물위에 고개를 떨구고 있는 연화도수(蓮花倒水)의 형국이라고도 하는데, 이와 같은 복잡한 형세론이나 형국론의 설명을 빌지 않더라도 누구나 이 자리에 서보면 그 아늑하고 평안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 비범한 자리임을 한눈에 눈치 챌 수 있을 것 같다.
조산 저 멀리로 보이는 산이 영도의 봉래산으로 조산(朝山)에 해당한다
묘 앞의 전순(前脣)에 대해 설명하시는 옥상 고문님
학풍회원들 한편, 이곳 정묘 터에는 고려 초에 이곳에 묻힌 정문도(鄭文道)와 그의 아들 정목(鄭穆), 그리고 후에 정목의 장인이 된 고익공 사이에 얽힌 다음과 같은 풍수설화가 전해진다. 고익공은 정문도가 동래지역 호장(戶長)으로 있을 때 중앙에서 파견된 풍수에 일가견이 있는 관리로, 그는 화지산을 가리키며 "좋기는 하나…"라고 하면서 뒷말을 잇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몇 차례 들은 정문도와 그의 아들 정목은 궁금했지만 그 사유를 끝내 듣지 못했는데, 그 후 고익공이 개경으로 전출하고 정문도가 사망하자 아들 정목은 아버지 묘소를 고익공이 가리키던 화지산에 쓰려니 그의 말이 생각나서 망설여졌지만 결국 지금의 자리에 쓰고 말았다고 한다. 그런데 부친을 묻은 다음날 묘소에 가보니 누군가 묘소를 파헤쳐 목관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고 한다. 목관을 다시 흙으로 덮고 감시를 하는데 밤이 깊어 삼경에 이르자 도깨비들이 나타나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이따위 목관을 묻느냐. 적어도 금관(金棺)을 묻어야지”라고 하면서 다시 묘를 파헤치고 사라졌다고 한다. 정목은 금관을 어떻게 마련할까 하고 근심하고 있는데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도깨비 눈에는 보릿짚이 금빛으로 보이니 보릿짚으로 목관을 싸면 된다.”라고 하였다 한다. 날이 새자 정목은 보릿짚으로 목관을 싸서 흙으로 묻고 다시 묘소를 감시하였는데 이번에도 지난밤의 도깨비들이 나타나서 또 무덤을 파헤치더니 보릿짚으로 싼 목관을 보고는 “금관이야. 이제 됐어. 어서가자”라고 하면서 행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다시는 도깨비가 나타나 묘를 파헤치는 일은 없었고, 묘를 쓴 그 해 여름 어느 날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하더니 황령산 괴시암의 바위를 산산조각으로 부셔버렸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정목은 개경에 있는 고익공을 찾아가 부친의 묘를 쓰고 일어났던 내용을 소상히 밝히자, 고익공은 "부친의 묘 터가 역적이 배출될 터이지만 황령산의 괴시암이 깨어졌으니 이제 그 묘소와 정씨가문의 화근이 사라졌다"라고 하면서 정목을 거두어 관직에 출사하게 하고 자기 딸과 혼인시켰다고 한다. 다분히 정씨 문중에서 시조 묘를 신성시하기 위해 만들어낸 혐의가 짙은 이야기이지만, 이 묘 터가 지닌 풍수적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측면도 배제할 수 없을 듯하다.
학풍회원들 정묘를 둘러보는 것으로 오늘의 간산이 끝났다. 내 나이 20대 중반부터 30대 후반까지 10년이 넘는 꽃다운 세월을 바쳐 그 문을 두드렸으나 끝내 열지 못한 자의 한(恨)을 품고 이 도시를 떠난 지도 어언 8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오늘 하루 그 8년의 시간을 격(隔)하고 다시 이 도시를 돌아보았다. 이 도시를 떠나 산 8년의 세월 동안 나는 무엇을 향해 달려왔던 것일까. 처음 얼마간의 시행착오를 제외하고는 나름대로 치열하고 집요하게 매달린 세월이었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쨌거나 또 봄은 오고 있고 나는 다시 새로운 씨를 뿌리지 않으면 안 된다. 2010년 3월 13일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 月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