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대장노릇 하기의 고단함에 대하여

월지 2008. 6. 23. 01:34

 

늦은 아침을 먹고

베란다 너머로 창밖을 내다보니

회색빛 구름이 낮게 드리웠다.   


불순한 일기를 핑계로

진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졸병들과 

바보상자의 영유권 다툼만 하고 있기에는

가장으로서의 체통이 서지 않는다.


화끈한 개봉영화도 없으니

시내 나들이는 더욱 마땅치가 않고

그렇다고 이런 날씨에 겁 없이 산으로 가자고 했다가는

두 졸병이 벌떼처럼 달려들 것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대장의 휴일은 고달프다.  


그때 번쩍하고 천제신(天才神)이

대장의 머리 위로 강림(降臨)하셨나니.


그래! 그거다!! 그거다!!! 바로 그거다!!!!

정자(亭子)! 지난주 토요일 산행 후

하산주(下山酒)를 했던 바로 그 정자(亭子).

 


누마루 위에 텐트를 치고

바닥에 에어 매트리스와 이불을 깔아주자

졸병들은 대장을 내쫓아버리고 저희들끼리 텐트를 독차지해 버린다.


그리고 이럴 때를 대비해

집사람으로부터 바가지께나 긁히고 산 이동용 간이책상마저 뺏기고

집지키는 개 마냥 텐트 앞에 웅크리고 앉아 책에 코를 박고 있자니

졸병들의 공부는 왜 그렇게 요란한 것인지.

 


얼마를 버티지 못하고

라면을 끓여 졸병들을 먹였다.

후식으로 커피까지 챙겼다.


배를 채운 졸병들은 텐트 안에서 조용하게 잠이 들었고

텐트 밖을 지키는 대장은 비로소 원하던 평화를 얻었다.

 


간간이 내리는 이슬비가 촉촉하게 땅을 적셨고

이따금 푸득거리는 찬바람이 텐트를 잡아 흔들며 지나갔다.


텐트 안의 시간과 텐트 밖의 시간이

그렇게 초여름의 푸르름 속에서 흘러갔다.


2008년 6월 22일

못은 달은 미추는 거울 月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