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불러주지 않아도 가을은 이미 그렇게 와있었다[사자평 산행기]
2007년 9월 29일.
하늘은 잔뜩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오전 9시 30분.
밀양 표충사 왼쪽의 계곡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연하고질(煙霞痼疾)의 정예(精銳) 9명이 산행을 시작하였다.
산행 들머리에는 한국 현대불교사의 큰 별.
효봉(曉峰) 대선사의 사리탑(舍利塔)이 우뚝 서있었다.
선사(禪師)는 왜정시절 판사생활을 하다
인간이 인간을 판단하는 판사(判事)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껴
머리 깎고 출가(出家)를 하였다든가.
장부(丈夫)의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하기 위해
세속(世俗)의 부귀공명(富貴功名)을 미련 없이 내던지고
불가(佛家)에 몸을 던진 그 용기에 고개가 숙연해졌다.
한계암에 이를 때까지
길은 계곡을 따라 완만하게 이어졌다.
계곡은 기암괴석(奇巖怪石)으로 수려하였고
적지 않은 물이 암반을 타고 낮은 곳으로 흘러내렸다.
물은 자신을 낮춤으로써 더 큰 자유를 얻는 것이리라.
한계암에 이르니
몇 개의 폭포가 연달아 나타나며
그 동안 흘린 땀을 시원하게 식혀 주었다.
한계암을 지나자
길은 계곡을 벗어나 능선으로 이어지며
조금씩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초 생각했던 것만큼 경사가 심하지는 않았다.
이따금씩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흐린 날씨에 비해 시야도 좋았다.
거기다 지난밤 계모임에서 친구들의 2차 제의를 물리치고
일찍 귀가해 잠을 충분히 자서 그런지 몸도 가벼웠다.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경쾌한 산의 느낌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정상을 1/3쯤 남겨둔 지점에 이르자
서서히 운무(雲霧)가 몰려와 산을 감싸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2시 정각에 도착한 사자봉 정상은
온통 운무의 천지였고 약간의 가랑비가 섞인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잠시 쉴 틈도 없이 남쪽 사면을 따라 뛰듯이 천황재로 내려왔다.
천황재도 운무의 천지였다.
운무에 젖은 무성한 억새가 몽환적이었다.
천황재의 주막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빈속에 희멀건한 탁주와 50도가 넘는 고량주를 몇 잔 털어 넣고 나니
위장이 찌르르하면서 알딸딸한 취기가 몰려왔다.
오후 1시 10분 점심식사를 마치고
동남쪽으로 수미봉을 우회하여 질펀한 평원을 걸었다.
그사이 운무는 흩어지고 드문드문 억새밭이 펼쳐졌다.
하늘거리는 억새와
그 아래로 무리지어 피어난
쑥부쟁이와 구절초의 소박한 꽃잎들...,
누가 불러주지 않아도
가을은 이미 그렇게 와 있었고
누가 돌아보지 않아도
꽃들은 벌써 그렇게 피고지고 있었다.
오후 2시 20분.
고사리 분교터를 지났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폐교된 건물이 남아 있고
산행객들을 기다리는 주막이 있어
주말이면 제법 흥청거리는
시골장터를 방불케 하는 곳이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 때 그 자리엔 풀과 나무만 잔뜩 우거져 있었다.
문득,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복잡한 것을 풀며,
빛을 부드럽게 하며, 골고루 티끌을 앉게 한다(노자 도덕경 제4장 중 일부).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 도(道)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복잡한 문명(文明)을
무디게 하고 풀고 부드럽게 하고 티끌 앉게 하여
주위의 자연(自然)과 같은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다.
인간들이 이러한 도의 작용을 조금만 깨닫더라도
저 산 아래의 억모구리 같은 악다구니가 조금은 덜해지리라...,
분교터를 지나자 잘 닦여진 임도가 이어졌다.
중간에 약간의 빗방울이 날리자
모두들 배낭에 방수포를 뒤집어 씌웠는데
갈산님과 이화님의 뒷모습이
무당벌레와 닌자거북이를 연상시켰다.
임도는 부드럽고 길었다.
건너편의 수려한 바위절벽과
층층폭포 아래로 길게 이어진 계곡에 눈길을 주며
세월아 네월아 하며 걸었다.
그렇게 황소걸음으로
표충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하니 오후 4시였다.
산은 다시 짙은 운무 속으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우리는 차를 타고
사자평 명물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안주로 닭백숙을 시키고
약초가 둥둥 떠 있는 동동주를 동이째 마셨다.
오후 5시 30분 하산주 자리를 마치고
평상에서 내려오니 닭백숙을 삶는 아궁이에는
매캐하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장작불이 이글거렸고
되돌아본 산은 완전히 구름 속으로 사라져
오늘의 산행이 꿈속의 일이었던 듯 아득하였다.
2007년 9월 29일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 月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