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및 여행기

물가의 나무가 단풍도 더 곱다는데[담양-남원-화엄사-남해 여행기]

월지 2007. 8. 8. 01:30

 

2007년 7월 23일 월요일. 여름휴가 첫날이다. 올해는 7월말과 8월초가 같은 주에 걸쳐 있어 엉겁결에 휴가를 잡다보니 본격적인 휴가시즌보다 한주 앞선 휴가가 되어버렸다.


오전 10시 조금 넘은 시각 집을 나섰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구까지 갔다가 다시 88올림픽고속도로로 갈아탔다. 말이 고속도로이지 요즘의 잘 닦인 4차선 국도보다 못하다. 정통성 없이 집권한 군사정권이 동서화합을 도모한다며 군사작전 수행하듯 후다닥 해치운 흔적이 역력하다. 중앙분리대도 없는 왕복 2차선의 콘크리트 포장길이 들을 가로지르고 산을 관통하며 구불구불하게 이어졌다.


길은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다가 함양을 지나 지리산 팔랑치 고개를 넘어서면서부터 고도를 낮추며 순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전라도 땅이다. 이렇게 직접 여행을 해보면 산과 물이 땅을 가르고 그것을 경계로 독특한 지역색이 나타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남원을 지나고 순창을 거쳐 담양에서 내렸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담양읍내로 들어서니 전형적인 중소도시의 풍경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하천을 끼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군청, 경찰서, 도서관, 농협, 버스터미널, 공설운동장 따위 도시기반시설들..., 대한민국 어디를 가도 똑같은 구조다.

 


오후 2시. 담양군청 앞에서 김해 장유에서 장인․장모를 모시고 온 동서 내외를 만났다. 곧바로 읍내를 조금 벗어나 동서네가 미리 예약해둔 대나무통밥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대나무로 조리한 몇 가지 음식이 조금 특이할 뿐 그저 그런 맛이다. 음식을 음미하면서 떠올린 것은 단지 초등학교 때부터 도식적으로 달달 외워왔던 담양(潭陽)은 곧 죽향(竹鄕)이라는 박제된 지식의 단편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번 여행에 기꺼이 동의한 것은 담양이 가사문학(歌辭文學)의 본향(本鄕)이자 그것을 가능하게 한 정자(亭子)와 원림(園林)의 고장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점심을 먹고 우리가 2박 3일을 묵을 숙소인 담양리조트로 향했다. 담양호 아래에 위치한 리조트는 호텔과 온천, 수영장을 갖추고 널찍한 부지를 거느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든 것은 모든 건물이 단층 혹은 2층으로 되어 있어 위압감을 주지 않고 편안하고 포근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

 


호텔방에 들어가 짐을 정리하자마자 바로 수영장으로 직행하였다. 제일 신이 난 것은 물론 딸아이였다. 아직은 본격적인 휴가시즌이 아닌데다가 평일이라서 그런지 수영장은 한산하였다. 느긋하게 늘어져 엉뚱한 공상에 빠져 있는 것도 잠시. 딸아이와 놀아주라는 집사람의 성화에 귀가 따가웠다. 남자에게 있어 휴가(休暇)라는 것은 쉬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노동일뿐이다.

 

 


저녁 8시. 수영과 온천을 마치고 호텔방으로 돌아와 직접 저녁을 해먹었다. 직접 밥을 해먹자는 발상은 순전히 알뜰하신 장모님의 제안과 준비 때문이었다. 덕분에 2박 3일 동안의 담양체류기간 중 아침․저녁은 집에서 밥을 먹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혼자 빠져나와 호텔 휴게실에서 책을 읽었다. 참 재미없는 사위이자 형부였지만 시설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혼자만의 사색(思索)에 잠길 수 있는 그 시간이야말로 내게는 꿈같은 휴식이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에 빠져 있다 보니 1시가 훨씬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2007년 7월 24일 화요일. 모두들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해먹고 오전 9시에 호텔을 나섰다. 오늘은 내가 담양여행에 기꺼이 동의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는 정자와 원림의 답사(踏査)가 있는 날이다. 담양의 관광지도를 보면, 동북쪽의 담양호(潭陽湖)와 서남쪽의 광주호(光州湖)의 두 물줄기가 합쳐지면서 영산강 상류를 형성하고 담양읍은 이 두 물줄기 사이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광주호를 향해 달려갔다. 무등산 북쪽 자락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광주호를 거치고 담양읍을 지나 영산강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이 물줄기를 따라 취가정, 환벽당, 소쇄원, 서하당, 부용당, 식영정, 송강정, 면앙정 등이 줄지어 서있다.

 

 


취가정과 환벽당은 남북으로 길쭉하게 누운 둔덕의 동쪽사면에 조성되어 있고 서로간의 거리가 300m 남짓한데 그 앞으로 창계천(혹은 자미탄)이라는 개울이 흐른다. 그리고 창계천 건너편으로 보이는 산이 성산(星山: 별뫼, 정철의 성산별곡은 이 산 이름에서 나왔다)이다. 취가정(醉歌亭)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김덕령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고종 27년(1889년)에 세운 것이고, 환벽당(環璧堂)은 김덕령의 할아버지인 사촌 김윤제가 세운 정자이다.

 


이 김윤제를 중심으로 우리가 국어 시간에 익히 들었던 이름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데, 서하당 김성원은 김윤제의 조카이고, 송강 정철은 김윤제의 외손녀와 결혼을 했다. 또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는 김윤제의 처남이고, 양산보와 하서 김인후는 서로 사돈간이며, 양산보와 면앙정 송순은 이종간이고, 석천 임억령은 김성원의 장인이다. 이렇게 서로 친인척간으로 얽힌 이들이 호남가단(湖南歌壇)을 형성했다.

 


송강 정철은 서하당 김성원과 함께 이 환벽당에 머물며 김윤제에게서 배웠고, 그의 성산별곡에서 환벽당 앞으로 보이는 경치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짝 맞은 늘근 솔란 조대에 세워두고 

그 아래 배를 띄워 갈대로 던져두니

홍료화  백빈주 어느 사이 지났는지

환벽당 용의 소히 배 앞에 닿았더라.

 


그러나 환벽당은 소나무와 잡목이 빽빽하게 둘러쳐져 있어 주위가 제대로 조망되지 않았고, 그 앞의 개울도 물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용소(龍沼)와 조대(釣臺)도 성산별곡에서 엿보이는 환상적인 분위기는 느낄 수가 없었다. 

 

 

 

 

 

 


취가정과 환벽당을 대충 둘러보고 창계천을 건너 성산자락에 웅크리고 있는 소쇄원으로 갔다. 소쇄원(瀟灑園)은 양산보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그의 스승이던 조광조가 무참히 희생되는 것을 보고 벼슬에 뜻을 접고 은거(隱居)하기 위해 조성한 원림(園林)이라고 하는데, 울창한 대나무 숲을 얼마쯤 걸어 들어가니 작은 개울을 끼고 초가집 1채와 기와집 2채가 서있다. 각 집마다 대봉대(待鳳臺), 광풍각(光風閣), 제월당(霽月堂)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자연(自然)에 최소한의 인공(人工)만을 가한 가장 한국적인 정원(庭園)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빼어난 절경(絶景)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자주 들어서인지 아니면 시간에 쫓겨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지 당초 상상한 것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소쇄원을 나와 가사문학관(歌辭文學館)으로 갔다. 건물과 조경에 돈을 들인 흔적은 역력했으나 그 내부의 전시물은 건물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지방자치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이후 지방자치단체가 벌이는 이 같은 초호화판 관광상품 포장행위는 아무래도 지나친 데가 있는 듯싶다. 문화(文化)를 담는 그릇은 반드시 내용물에 걸 맞는 크기와 형식이 있는 법이다. 무조건 크고 화려하게 짓는다고 좋은 것은 아닐 터이다.

 


어쨌거나 이런 전시공간에 갈 경우에는 조금 당혹스럽다. 전시물에 정신이 팔려 있다 보면 시간은 후다닥 지나가고 같이 간 집사람과 딸아이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온몸을 뒤틀며 빨리 나가자고 성화를 부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의 경우도 별반 나을 것은 없었다. 집사람을 포함하여 처가쪽 식구들은 모두 이과(理科) 계통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나 같은 문과(文科)쪽 취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한지로 부채를 만들어 보는 체험관(體驗館)이 있어서 잠시 동안이나마 딸아이의 관심을 붙잡아 둘 수가 있었고, 그 덕분에 제법 여유 있게 전시물을 살펴볼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사문학관을 나오니 점심때가 훌쩍 넘어 있었다. 집사람과 딸아이를 동서네 차에 태워 담양읍내에 있는 식당으로 먼저 보내고, 나와 장인․장모는 서하당 김성원이 그의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지었다는 식영정(息影亭), 서하당(棲霞堂), 부용당(芙蓉堂)을 둘러보았다. 서하당과 부용정은 최근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식영정은 성산(星山)으로부터 흘러내린 산자락 중 하나가 잠시 숨을 고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앞 소나무 사이로 정면 왼쪽으로는 무등산이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는 광주호가 보였다. 송강 정철은 그의 성산별곡에서 이곳 식영정을 둘러싼 풍광과 서하당 김성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어떤 길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 산중에 들고 아니 나오신가.


 (중략)


산중에 책력 없어 사시를 모르더니

눈 아래 펼친 경치 철철이 나타나니

듣거니 보거니 모두가 선계(仙界)로다.


매화창 아침볕의 향기에 잠을 깨니 

산 늙은이의 할 일이 아주 없지는 아니하다

울밑 양지 편에 오이씨 뿌려두고

매거니 돋우거니 비온 김에 손질하니

청문고사(靑門故事)가 지금도 있다 하리

서둘러 짚신 신고 대지팡이 흩어 짚으니

도화 핀 시냇길이 방초주에 이었구나.

맑게 닦은 거울 속 절로 그린 돌병풍

그림자 벗을 삼고 서하로 내려가니

도원이 여기로다 무릉은 어디멘고.


남풍이 잠깐 불어 녹음을 헤쳐내니  

철 아는 꾀꼬리는 어디에서 왔었던고

희황 베개 위에 선잠을 얼핏 깨니,

공중의 젖은 난간이 물 위에 떠 있구나.

삼베옷을 여며 입고 갈건을 비껴쓰고,

허리를 구부리거나 기대면서 보는 것이 고기로다.

하룻밤 비 온 뒤에 붉은 연꽃과 흰 연꽃이 섞어 피니,

바람기가 없어서 모든 산이 향기로다.

염계를 마주보아 태극을 묻는 듯

태을 진인이 옥자를 헤쳤는 듯

노자암 바라보며 자미탄 곁에 두고

장송을 차일 삼아 돌길에 앉아보니

인간 세상 유월 달이 여기는 가을이로다.

청강에 떠 있는 오리가 흰 모래에 옮겨 앉아,

흰 갈매기를 벗삼고 잠깰 줄을 모르나니,

무심하고 한가함이 주인과 비교하여 어떤가.


오동나무 사이로 가을달이 사경에 돋아오니,

천암만학이 낮보다도 더 아름답구나.

호주의 수정궁을 누가 옮겨 왔는가.

은하수를 뛰어 건너 광한전에 올라 있는 듯.

한 쌍의 늙은 소나무를 조대에 세워 놓고,

그 아래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내버려 두니,

홍료화 백반주를 어느 사이에 지났길래.

환벽당 용의 못이 뱃머리에 닿았구나.


 (중략)


소동파의 적벽부에는 가을 칠월이 좋다 하였으되,

팔월 보름밤을 모두 어찌 칭찬하는가.

잔 구름이 흩어지고 물결도 잔잔한 때에,

하늘에 돋은 달이 소나무 위에 걸렸으니,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졌다는 이태백의 일이 요란쿠나.


공산에 쌓인 낙엽을 북풍이 걷으며 불어,

떼구름을 거느리고 눈까지 몰아오니,

온갖 나무들을 잘도 꾸며 내었구나.

앞 여울물 가리워 얼고 외나무다리 걸려 있는데,

막대를 멘 늙은 중이 어느 절로 간단 말인가.

산 늙은이의 이 부귀를 남에게 소문내지 마오.

경요굴 은밀한 세계를 찾을 이가 있을까 두렵도다.


산중에 벗이 없어 서책을 쌓아 두고

만고의 인물들을 거슬러 헤아리니

성현은 물론이요 호걸도 많고 많다.

하늘이 만드실 때 곧 무심할까마는

어찌 한 시운(時運)이 일고 기울고 하였는고.


 (중략)


엊그제 빚은 술이 얼마나 익었는가.

잡거니 밀거니 실컷 기울이니

마음의 맺힌 시름 적으나마 풀려진다.

거문고 줄에 얹어 풍입송(風入松)켜는구나.

손인지 주인인지 다 잊어 버려무나.

창공의 떴는 학이 이 고을의 신선이라

휘영청 달빛 아래 행여 아니 만나잔가.

손님이 주인에게 이르기를 그대 긴가 하노라.


담양읍내로 돌아와 불고기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고기값이 유난히 싸다 싶었는데 역시나 수입쇠고기였다. 질기고 노린내가 났다. 점심식사를 끝내고 동서 내외와 딸아이는 수영을 하기 위해 리조트로 돌아가고 장인․장모와 우리집 내외는 다시 정자(亭子)를 순례(巡禮)하기로 했다.

 


먼저 송강정을 찾았다. 송강정(松江亭)은 넓은 들판을 내려다보는 야트막한 언덕위에 앉아 있었다. 선조 17년(1584) 송강 정철이 대사헌을 지내다 당시의 동인과 서인의 싸움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후 창평(昌平: 담양의 옛 이름)에 내려와 원래 이곳에 있던 죽록정(竹綠亭)을 개수(改修)한 것이 송강정인데, 이곳에서 그의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이 지어졌다 한다. 송강의 빛나는 문학성(文學性)과 애주(愛酒)의 낭만성(浪漫性)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찬사(讚辭)를 보내지만, 그의 전후미인곡에서 보여 지는 지나친 연주가(戀主歌)는 당대의 시대상황을 고려한다하더라도 노골적인 권력에 대한 아부로 비쳐져 거부감이 없지 않다.

 


송강정을 내려와 면앙정을 찾아가는데 표지판으로 보나 지형지세로 미루어 분명히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좀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지형상으로 분명히 이 근처에 있어야 맞는데..."라고 혼자 중얼거리자, 장모가 ”자네는 처음 와보는 곳인데도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아느냐?"며 혀를 찬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커다랗게 면앙정(俛仰亭)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 면앙정 역시 넓은 들판과 그 앞을 흐르는 개울이 내려다 뵈는 나지막한 둔덕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면앙정은 면앙 송순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지은 것인데, 송순은 그의 면앙정가(俛仰亭歌)에서 이곳의 풍광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중략)


옥천산, 용천산에서 내리는 물이

정자 앞 넓은 들에 끊임없이 퍼져 있으니,

넓거든 길지나, 푸르거든 희지나 말거나,

쌍룡이 몸을 뒤트는 듯, 긴 비단을 가득하게 펼쳐 놓은 듯,

어디를 가려고 무슨 일이 바빠서

달려가는 듯, 따라가는 듯 밤낮으로 흐르는 듯하다.

물 따라 벌여 있는 물가의 모래밭은 눈같이 하얗게 펴졌는데,

어지러운 기러기는 무엇을 통정(通情)하려고

앉았다가 내렸다가,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갈대꽃을 사이에 두고 울면서 서로 따라 다니는고?

넓은 길 밖, 긴 하늘 아래

두르고 꽂은 것은 산인가, 병풍인가, 그림인가, 아닌가.

높은 듯 낮은 듯, 끊어지는 듯 잇는 듯,

숨기도 하고 보이기도 하며, 가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며,

어지러운 가운데 이름난 체하여 하늘도 두려워하지 않고

우뚝 선 것이 추월산 머리 삼고,

용구산, 몽선산, 불대산, 어등산,

용진산, 금성산이 허공에 벌어져 있는데,

멀고 가까운 푸른 언덕에 머문 것도 많구나.

흰 구름, 뿌연 안개와 놀, 푸른 것은 산 아지랑이.

수많은 바위와 골짜기를 제 집으로 삼아두고.

나며 들며 아양도 떠는구나.

오르기도 하며 내리기도 하며 넓고 먼 하늘에 떠나기도 하고

넓은 들판으로 건너가기도 하여, 푸르락 붉으락,

옅으락 짙으락 석양에 지는 해와 섞이어

보슬비마저 뿌리는구나. 뚜껑 없는 가마를 재촉해 타고

소나무 아래 굽은 길로 오며 가며 하는 때에,

푸른 버들에서 지저귀는 꾀꼬리는 흥에 겨워 아양을 떠는구나.

나무 사이가 가득하여 녹음이 엉긴 때에

긴 난간에서 긴 졸음을 내어 펴니,

물 위의 서늘한 바람이야 그칠 줄 모르는구나.

된서리 걷힌 후에 산 빛이 수놓은 비단 물결 같구나.

누렇게 익은 곡식은 또 어찌 넓은 들에 퍼져 있는고?

고기잡이를 하며 부는 피리도 흥을 이기지 못하여 달을 따라 부는 것인가?

초목이 다 떨어진 후에 강과 산이 묻혀 있거늘

조물주가 야단스러워 얼음과 눈으로 자연을 꾸며 내니,

경궁요대와 옥해은산 같은 눈에 덮힌 대자연이 눈 아래 펼쳐 있구나.

자연도 풍성하구나.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경치로다.


(하략)

 


면앙정에 홀로 앉아 푸른 논밭을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워 물고 깊은 상념에 잠겼다. 물가의 나무가 단풍도 더 고운 법이다. 저 넓고 푸른 들판이 상징하는 것처럼 멋과 낭만과 풍류도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나는 이 자명한 이치를 왜 이제야 깨닫는가. 오직 한 가지 가치만을 고집하며 책속에서 무참(無慘)하게 소진(消盡)되어버린 내 젊음이여. 그래도 가장 좋은 날은 내 앞날에 남아 있으리..., 담뱃불이 점점 더 손끝으로 다가옴을 느끼며 황망히 불을 끄고 허허로운 걸음걸이로 가파른 돌계단을 밟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내친김에 명옥헌(明玉軒) 원림까지 들릴까하다가 더 이상 내 취향을 고집하다가는 집사람으로부터 무슨 소리를 더 들을까 두려워 그만두기로 했다. 이것으로 담양까지 달려온 내 나름의 목적은 모두 이루어진 터이다. 자 이제는 법(法)대로...,

 

 


면앙정을 뒤로하고 담양읍내에서 지척(咫尺)의 거리에 있는 죽녹원(竹綠園)으로 갔다. 죽림(竹林)사이로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산책로가 이국적(異國的)인 풍경(風景)이었다. 극성스러운 모기떼와 사람들의 왁자지껄함만 없다면 송강이 그의 관동별곡 첫머리에서 “강호(江湖)에 병(病)이 깊어 죽림(竹林)에 누웠더니”라고 노래한 바와 같이 복잡한 속진(俗塵)에서 벗어나 세외(世外)의 고적(孤寂)함에 젖어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죽녹원을 벗어나 전나무가 길가에 씩씩하게 도열(堵列)해 있는 메타세콰이어길을 거치고 다시 담양호를 반 바퀴쯤 돌아 리조트로 돌아왔다. 그러나 전나무는 담양읍내 곳곳의 연도(沿道)에 심어져 있어 별 감흥이 없었고, 담양호 또한 별 볼거리는 없었다.


이날도 리조트로 돌아온 이후에는 온천욕(溫泉浴)을 하고 저녁을 지어먹고 늦은 시각까지 휴게실에 앉아 책을 보았다. 덕분에 이틀 동안 300쪽이 조금 넘는 책 한권을 독파했다.


2007년 7월 25일 수요일. 담양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 리조트 바로 앞으로 보이는 금성산성(金城山城)에 오를 심산으로 나홀로 차를 몰고 나왔다. 그런데 막상 매표소를 지나 주차장에 도착하여 금성산을 올려다보니 그 거리가 만만치 않아보였고 금성산성까지 갔다 오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았다. 산행을 포기하고 다시 리조트로 돌아갈까 하다가 문득 ‘연동사지 2Km’라는 표지판을 보고 차를 타고 연동사지로 향했다.

 

 

 


금성산 서쪽 자락 중턱에 위치한 연동사지(煙洞寺址)는 거대한 퇴적암(堆積巖)의 바위동굴이었다. 그리고 그 동굴 아래로 투박하고 고졸한 모습의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과 삼층석탑(三層石塔)이 세월을 잊은 듯 서있었다. 고려 말에 조성되었다는 안내문의 진실성을 담보하기라도 하는 듯 구부정하게 서있는 지장보살상은 민초(民草)들의 소박한 염원을 담고 있었다.


다시 리조트로 돌아와 아침밥을 먹고 짐을 챙겨 오전 11시 30분경 호텔을 나섰다. 전날 점심을 먹고 리조트로 바로 돌아온 처제(妻弟)가 읍내구경에 아쉬움이 남았는지 관방제림을 둘러보고 가자고 하였다.

 

 

 

 

관방제림(官防堤林)은 어제 우리가 둘러본 죽녹원 바로 앞에 있는 강둑에 조성된 숲이었는데 조선 인조 26년(1648) 당시 부사 성이성이 수해(水害)를 막기 위해 제방(堤防)을 축조하고 나무를 심었는데, 그 후 철종 5년(1854)에 부사 황종림이 다시 이 제방을 축조하면서 그 위에 숲을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수령이 300년이 넘은 커다란 느티나무과의 나무들이 약 2Km에 걸쳐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강변의 둔치를 따라 나있는 콘크리트 포장길에는 관광마차가 운행 중이었는데, 장인․장모, 동서 내외, 우리집 내외가 번갈아가며 한 번씩 마차를 탔다. 그리고 그 꼽사리에 끼어 내리 세 번을 탄 사람은 물론 우리 딸아이다.

 

 


담양을 뒤로 하고 국도를 타고 순창을 거쳐 남원으로 왔다. 담양에서 순창으로 이어지는 국도변으로 전나무 가로수(街路樹)가 예뻤다. 남원 시내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넓은 잔디밭 위로 커다란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오층석탑이 눈에 띄었는데 나중에 인터넷을 뒤져보니 김시습의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실린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에 나오는 그 만복사(萬福寺)의 유허지(遺墟地)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원시내로 들어와 광한루(廣寒樓)에 들렸다. 잘 조성된 연못과 인공섬 위에 들어선 전각(殿閣)들이 볼만하였다. 찬찬히 뜯어보면 재미있는 유래가 많을 듯했지만 시간에 쫓겨 건성건성 둘러보고 다시 길을 재촉하였다.

 

 

 

 

 

 


어떤 경로를 따라 돌아갈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섬진강 줄기를 따라 내려가는 국도를 타고 가기로 했다. 중간에 구례 화엄사 입구에 내려 산채정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잠시 화엄사 경내를 둘러보았다. 동서네와 헤어진 후에는 집사람과 딸아이에게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남해(南海)를 구경시켜 주기로 작정하고 있던 터라 해가 지기 전에 남해까지 가야한다는 시간적인 부담 때문에 절집의 각종 당우(堂宇)와 돌조각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절 구경을 마치고 화엄사 입구에서 동서네와 작별한 후 섬진강 줄기를 따라 길을 재촉하였다. 그 길은 부드럽고 포근하고 맑고 깨끗했다. 내년 봄 벚꽃이 만개(滿開)할 무렵에는 꼭 한번 다시 오기로 다짐했다. 강은 하류로 내려갈수록 넓어지며 바다를 닮아가고 있었다.

 

 

 

 


남해대교(南海大橋)를 건너 남해로 들어서자 서서히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남해읍을 지나 상주해수욕장을 거쳐 섬을 반 바퀴 돌고 창선․삼천포대교에 이르니 주위는 완전히 어둠에 젖어 있었다.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김해 장유에 있는 동서집에 들러 장인․장모를 태워 부산의 처가에 모셔다 드리고 다시 울산으로 돌아오니 밤 11시가 넘어있었다. 이로써 짧고도 긴 여름휴가 여행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