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및 여행기

서울 나들이

월지 2006. 10. 31. 08:49

 2006년 10월 28일 토요일. 서울에서 친척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울산에서 서울까지 나들이를 한다는 것이 좀 어려운 일인가? 이 기회에 세 식구가 서울 나들이를 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울산에서 관광버스를 타고가 결혼식에 참석하였다가 같이 올라간 일행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니 오후 4시가 넘었다. 잠실 성내역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탔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의 지하철은 사람들로 붐볐다.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많은 사람에 비해 너무나 협소한 공간이 마음을 각박하게 하고 몸을 긴장하게 만드는 도시..., 언제부터인가 서울은 내게 그런 도시로 각인(刻印)되어 있다. 군바리로서 2년 남짓, 고시 준비생으로서 3년 정도의 세월을 나는 서울 또는 서울 언저리에서 보냈다. 특히, 신림9동 산비탈에 밀집한 고시촌(考試村)에서의 생활은 아직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신산(辛酸)한 삶의 기억이다.

 

의자를 책상위로 올리고 그 밑으로 다리를 뻗어야 겨우 한 몸을 누일 수 있는 좁은 고시원 방. 거기다 방음(防音)도 제대로 되지 않아 기침소리조차 함부로 내지 못했다. 골목길도 모두 경사진 산비탈이다 보니 거기서 피우는 담배 맛이 제대로 날 리 없었다. 매일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을 정도로 긴장된 가운데 숨 가쁘게 진행되는 학원 강의의 진도를 따라가다 보면 주말에는 몸도 마음도 파김치가 되기 일쑤였다. 주말 저녁 면도날보다 더 날카로워진 신경을 풀어주기 위해 찾는 술집은 무릎이 서로 마주 닿을 정도의 공간 밖에 허락되지 않았고, 기분전환을 위해 비디오 방을 찾게 되면 거기도 30분정도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만큼 사람들로 붐볐었다(당시 신림동 고시촌만큼 비디오방이 성업한 곳은 전국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비디오 관람만이 고시생들의 유일한 정서생활이었다). 그 비디오방이라는 것도 몸 하나 편히 누일 공간이 못되기는 고시원 방과 다름이 없었다. 어쩌다가 큰맘 먹고 나서는 산행 길도 붐비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울 시민들은 일요일이 되면 젊은 여자들만 빼고 모두 산으로 몰리는 것 같았다. 관악산이고 북한산이고 서울의 모든 산들은 일요일만 되면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 길고 긴 원색의 행렬에서 체력단련 이상의 정서적 만족감을 찾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리하여 밤늦게 학원 강의를 마치고 올라오다 길가에서 파는 몇 잔의 잔술을 걸치거나 고시원 방에서 김밥을 안주 삼아 소주를 숨죽여 마시고 난 후의 알딸딸한 상태에서 나는 공간이 인간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절감했었다. 그리고 다짐했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지옥 같은 서울에서는 살지 않겠노라고..., 당시 내게 있어 서울은 사람이 살만한 데가 못되었다.

 

이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집사람은 그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 안에서도 마냥 들떠 있었다. 서울에서 살아야 문화생활도 누리고 사람도 세련되어 진단다. 문화(文化)라 - 뜬구름 잡는 허영(虛榮)은 아닐는지..., 세련(洗鍊)이라 - 닳고 되볼가져 인간미가 떨어지는 것은 아닐는지...,

 

 

 

 

을지로 3가 역에서 내려 잠시 걸어가니 새로 단장한 청계천(淸溪川)이 나왔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다니기가 뭣해 근처의 허름한 호텔방을 잡았다. 방을 잡아 짐을 두고 밖으로 나오니 벌써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청계천은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아니, 높다란 고가도로를 사이에 두고 온갖 종류의 허름한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선 옛날 풍경밖에 입력되어 있지 않는 나에게 청계천은 완전히 새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고기가 떼 지어 헤엄치는 맑은 물길을 따라 갈대와 억새와 버드나무가 무성하게 피어 있는 산책로는 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는 도심의 빌딩 숲속임을 감안하면 기적(奇蹟)과도 같은 축복(祝福)이었다. 건설과정에서 있었을 수많은 이해관계인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렇게 단기간에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成果)를 만들어 냈다는 점만큼은 이명박 전 시장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好不好)를 떠나 대단한 정치력임을 인정하고 싶다.

 

 

 

 

천변(川邊)의 풍경은 국제적이었다. 외양으로 보아 확연히 구별되는 노랑머리 긴 코의 외국인도 많았고, 생김새는 우리와 비슷했지만 일본어와 중국어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게다가 내국인이라도 방죽에 앉아 밀어를 속삭이며 노골적인 애정표현을 하는 젊은 커플이 많았다. 집사람은 연신 서울찬가를 늘어놓기에 바빴다.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마음대로 키스를 할 수 있는 저런 모습이 자신이 말하는 세련됨이란다. 지나가는 여자들은 모두가 키가 크고 예쁘단다. 못난 여자가 한명도 없단다. 할 말이 많았지만 참기로 했다. 괜히 한마디 했다가 뼈도 못 추릴 것이 뻔하다. 또 나름대로 즐거운 환상(幻想)을 깨고 싶지도 않았다.

 

산책을 마치고 다시 도로 위로 올라와 허름한 식당 골목을 걷다보니 근처에 서울극장과 단성사가 보였다. 서울극장에서 ‘라디오 스타’를 보았다. 극의 전개상 불필요하게 예쁜 여자 배우가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 안성기의 녹슬지 않은 연기와 잔잔한 웃음과 있을 법한 일상을 잘 버무려 낸 스토리의 전개가 볼만 했다. 무언가 가볍지 않은 상징(象徵)이 도처에 숨겨져 있는 것 같았지만 집사람과 딸아이는 그것을 곰곰이 생각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를 주지 않았다. 저녁 11시쯤 극장을 나왔는데 그냥 호텔방으로 들어가 잠을 자기에는 뭔가 허전했다. 길가에 늘어선 포장마차에서 순대볶음을 사들고 호텔방으로 들어가 소주 1병을 깠다. 지난 1주일의 피로가 전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장거리 여행을 해서 그런지 술병을 비우자 말자 곯아 떨어졌다. 

 

 

 

다음날인 2006년 10월 29일. 오전 8시에 눈을 떴다. 집사람을 벌써 일어나 씻고 화장까지 마친 상태였다. 대충 씻고 호텔방을 나왔다. 몇 개의 골목을 헤맨 끝에 간신히 문을 연 식당을 찾았다. 아침을 먹고 얼마쯤 걸어서 종묘로 갔다. 종묘앞 공원에는 많은 수의 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바둑이나 장기에 몰두해 있고, 나머지 일부는 먼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들이 살기에 도시는 결코 우호적인 곳이 못 된다는 것을 여기서 다시 확인하였다.

 

 

 

 

 

 

 

종묘 안으로 들어가자 몇 개의 전각(殿閣)이 나오고 아담하고 네모난 연못 가운데 작고 둥근 인공섬이 눈에 들어왔다. 동양의 천지관(天地觀)인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象徵)하는 듯 했다. 거기서 좀 더 들어가니 조선의 역대 왕들의 신위(神位)를 모신 길고 긴 사당(祠堂)이 나왔다. 종묘(宗廟)였다. 사직(社稷)과 더불어 한 국가(國家) 내지 왕조(王朝)를 상징(象徵)하는 곳.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경우 경복궁(景福宮)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종묘(宗廟)를, 서쪽에는 사직단(社稷壇)을 배치하였다. 천자(天子)란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존재라는 동양 전통의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반영한 교묘한 상징물들...,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터무니없는 사고를 바탕으로 한 지배체제가 현실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확실히 역사(歷史)는 진보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종묘를 대충 둘러보고 북서쪽의 육교(陸橋)를 건너가니 바로 창경궁(昌慶宮)으로 이어졌다. 일제식민지 시절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어 최근까지 동물원(動物園)으로 사용되던 곳. 근대사의 아픈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비운의 궁궐(宮闕)이다. 몇몇의 전각(殿閣)은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으나, 전체적으로 빈공간이 많아 을씨년스럽고 황량한 느낌이 들었다.

 

 

 

 

 

 

 

창경궁을 나와 택시를 타고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창덕궁(彰德宮)으로 이동하였다. 창덕궁은 단체관람만 허용되었다. 문화재 안내원의 인솔을 받아 정해진 루트를 따라 이동해야 했다. 덕분에 관람이 편해진 면도 있었다. 딸아이와 집사람은 문화재 안내원의 안내를 따르게 하고 나 홀로 보고 싶은 곳을 구석구석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 한번 와본 적이 있기 때문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래도 창덕궁은 조선의 가장 많은 왕들이 기거했던 곳이고 원형이 가장 많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인지 친근감이 갔다.

 

 

 

 

 

 

 

 

 

 

이렇게 호화로운 궁궐건물을 보고 있노라면 언제나 느끼는 것이 있다. 나라의 경제규모에 비해 턱 없이 호화롭고 사치스런 지배층의 생활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고혈(膏血)에 기반하고 있었을까 하는 지배와 착취의 역사에 대한 비판의식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아직도 이 땅의 절반은 저보다 더 심한 봉건왕정체제(封建王政體制)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기야 집사람도 아비는 남의 집 마름노릇 밖에 못하고 있는데 그 딸은 공주로 키우려 하고 있으니..., 반면 남편에게는 왜 그리도 집요하게 양성평등을 요구하는지..., 알 수 없노니 인간의식(人間意識)의 이중성(二重性)과 불균형(不均衡)이여!

 

창덕궁을 대충 둘러보고 근처의 중국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나오니 오후 2시였다. 당초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오후 4시에 KTX 열차를 예약해 둔 상태라 시간적인 여유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경복궁(景福宮)이나 보고가자며 북촌길을 따라 걸었다. 그런데 막상 국립민속박물관 입구에 도착하자 집사람이 갑자기 거기서 멀지 않은 인사동에 가보자고 졸랐다.

 

 

 

 

 

인사동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내 눈에는 별것도 없어 보이는데 집사람은 사람들로 웅성거리는 그 거리 자체가 좋은 모양이었다. 여기야 말로 사람이 사는 것 같다며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나는 하루 종일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어 다녀 허리가 아파 죽을 맛인데..., 이럴 때는 정말 전혀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처럼 이질감이 느껴진다.

 

 

 

 

 

 

 

대충 인사동 골목길을 훑어보고 나와 보신각(普信閣)을 지나고 충무공동상(忠武公銅像) 앞을 지나고 덕수궁(德壽宮) 앞을 지나고 서울시청을 지났다. 남대문(南大門)이 바로 앞에 보였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걸을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거기다 열차시각이 15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서울역으로 직행하였다. 부랴부랴 탑승수속을 밟고 KTX에 올라탔다. 열차가 출발한 지 얼마 동안은 눈을 뜨고 있었으나 누적된 피로가 눈꺼풀을 무겁게 내리누르더니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그리하여 열차가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전혀 실감해 보지도 못한 채 동대구역에 닿았다.  

 

 

 

 

 

동대구역 광장으로 나오니 주위는 벌써 어둠이 내려 있었고, 울산가는 고속버스 시간을 알아보니 가장 빠른 차가 저녁 7시 40분에야 있단다. 버스표를 끊고 차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터미널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몸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워 입맛이 없었다. 그래도 반주로 소주 1병을 비웠다. 울산행 버스에 오르자말자 곯아떨어졌다. 울산에 도착하니 저녁 9시가 넘어 있었다. 신복로타리 정거장에서 내려 집까지 가는데 버스로 2구간도 채 못 되는 거리를 걸을 힘이 없어 다시 택시를 탔다.

 

이렇게 몸이 파김치가 되도록 요란하게 서울 나들이를 하면서 딸아이에게 많은 것을 보여 주었지만 나는 아이에게 학습과 관련된 것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과연 저 아이의 머릿속에는 이번 여행이 어떤 추억으로 남게 될까?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단순한 유적과 유물이 아니라 거기에 깃들어 있는 역사속 인간의 은은한 숨결과 파란만장한 생활임을 깨닫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2006년 10월 30일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 月池